황당한 부탁 나무라지 못해
스스로 존중하지 못하는 승가
누구에게 존중받을 수 있을까

혜인스님

“신부든 목사든 교수든 선생이든 부르는 사람 마음대로 ‘님’자를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는데 왜 유독 스님만 ‘님’자를 떼고 ‘스’라고 부를 수 없나요?” 작년 어느 때인가 우리 절을 찾아왔던 한 거사에게 들은 말이다.

외할아버지가 스님이시고 불교 집안에서 자랐다고 하시는 걸 보니 괜한 투정을 부리시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 이 사람은 우리 모습의 어떤 부분에 ‘님’자를 떼버리고 싶을 만큼 실망하고 상처받으셨을까.

‘스’라고 부르면 어색하니까 스님도 ‘님’자를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이름으로 바꿔 달라는 좀 황당한(?) 부탁에, 한번 바꿔보겠다는 황당한 대답으로 대화를 마무리했었다. 내가 그때 승가를 비난하는 그분을 나무라지 못했던 것은 ‘님’자를 붙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행자 때는 누구 앞에서건 차수(叉手)하고 우슬착지(右膝着地)하다가 볼품없어 보인다고 핀잔을 듣기도 했었다. 이제는 누구든 내 앞에서 공손히 손을 모으고 무릎 꿇으시지만 그렇다고 내가 더 볼품이 있어진 건 아닌 것 같다.

사실 지금도 가끔 재가불자들에게 반말을 듣거나, 법복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목례만 까딱 받을 때도 있다. “어쩌라구”라든지 “나한테 맞을래?”라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나는 이것을 현재 불교계의 문제라든가 승가의 태만 때문이라고 치부하거나 포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전에 이것은 그저 나의 문제일 뿐.

‘행자는 바퀴벌레보다도 못하다’는 소리를 듣던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는 누구 앞에서건 공손히 손을 모으고 오른 무릎을 꿇는 일이 자연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래도 무얼 좀 안답시고 나를 무시하는 사람 앞에서 절대 공손해 지지가 않는다.

내게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내 나이가 더 어리다거나 위의가 부족하기 때문에 무시당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반증. 아마도 상대를 존중하고 있지 않은 내 마음. 공손히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싶지 않은 뻣뻣한 내 마음을 그들이 비춰주고 있는 것이리라.

행자 시절, 수행을 하다 보면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말씀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스님께 달려가서 왜 수행을 하면 업신여김을 받아야 되냐고 여쭈었었다. 그리고 스님은 대답 대신 “누가 널 업신여기니?” 하고 되물으셨다. 나는 그때 누군가에게 무시당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며 “그런 건 아닌데요….” 했었다. 그때는 내가 무시당한다는 것이 부끄러웠는데, 지금은 누군가를 무시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니, 무언가가 뒤바뀐 것만은 확실하다.

행자 때는 일이 고되어서 겨우 일을 마치고 어른 스님의 강의를 들을라치면 시작하는 인사 죽비소리에 깜빡 잠이 들었다가 수업 끝나는 죽비소리에 일어났었다. 그런데도 스님들은 강의 내내 졸고 있는 나를 깨우지 않으셨다. 부처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왜 부처님 말씀에 졸고 있냐고 나무라지 않으셨다. 나를 무시하지 않으셨다. 행자들의 고됨을 아마 잘 아시기에 바퀴벌레보다도 못하다는 행자였던 나를 존중해주셨던 걸 테다. 참 감사했고 따뜻했다.

그러니 내가 지금도 가끔 무시당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도 누군가를 무시하고 있다는 뜻이고, 내가 지금도 누군가를 무시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 내가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구에게 존중받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는 승가가 누구에게 존중받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것은 그 누군가의 문제이기 이전에 그저 내 문제일 뿐이다.

혜인스님 고양 중흥사

[불교신문3555호/2020년2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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