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0주년 특별기획’
“큰스님의 잔소리…지나보니 다시 못 만날 가르침”

출가수행자라면 누구나 행자와 사미 또는 사미니 과정을 거친다. 행자와 사미과정을 이수한 뒤에라야 비로소 비구, 비구니가 된다. 이 시기 배운 것이 평생의 밑거름이 된다고들 한다. 출가를 결심할 때, 삭발할 때, 구족계를 받을 때의 초발심이 경전에서 견고한 금강석에 비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하지 않았던가.

1988년, 당시 봉선사 주지 월운스님은 방청소가 한창인 시자 초격 사미(뒤)를 불러 사진을 찍었다. 시자는 이쁨 받은 만큼 혼도 많이 났다. 돌아보면 두번 다시 접할 수 없는 큰 가르침을 받던 때였다.
1988년, 당시 봉선사 주지 월운스님은 방청소가 한창인 시자 초격 사미(뒤)를 불러 사진을 찍었다. 시자는 이쁨 받은 만큼 혼도 많이 났다. 돌아보면 두번 다시 접할 수 없는 큰 가르침을 받던 때였다.

 

#1

시자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주지스님의 뒤에 섰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는 영락없는 사미다. 방 청소를 하는 시자를 갑자기 불러 사진을 찍자며 뒤에 세웠다. 앞에 앉은 스님은 동국역경원을 오랫동안 이끌었던 봉선사 조실 월운스님이다.

조계종사에 있어서 월운스님은 역경 분야에서 큰 획을 그은 큰 어른이다. 은사인 운허스님을 이어 한문으로 된 경전을 우리말로 해석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 고마움은 종단의 모든 이들이 다 품고 있다.

운허스님과 월운스님이 주석한 제25교구본사 봉선사는 전국의 교구본사 가운데 유일하게 대웅전을 큰법당이라는 이름으로 편액을 달았다. 봉선사가 곧 역경의 산실임을 증명하는 듯하다.

하루는 젊은 시자가 월운스님의 책상에 널브러진 원고지까지 깔끔하게 정리했다. 경전 번역 작업이 한창이던 원고지였다. 이를 나중에 본 월운스님은 시자를 불러 원고지를 원래대로 다시 놓으라고 했다. 시자는 난감했다.

월운스님은 부처님 말씀을 잘 익히지 않고 어찌 출가수행자라 할 수 있겠느냐면서 불호령 대신 <치문>을 가져오라 했다. 치문은 출가 후 가장 먼저 배우는 경서다.

불호령 보다 무서운 벌칙이 내려졌다. 무릎을 꿇은채 하루 2시간씩 <치문>을 배웠다. 분명 무릎을 꿇은 시자가 공부 보다 온 신경이 몸에 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편히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3개월을 <치문>을 배웠다. 3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치문> 구절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은 다 월운스님의 호된 가르침 덕이다.

#2

사찰은 공동체생활을 근간으로 한다.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는 공유의 삶이다. “큰방 장판 때가 묻어야 안다는 말이나 스님들끼리 중 물이 들었네, 안들었네하는 말은 공동체를 실감하게 한다. 초격스님이 봉선사로 입산했던 1986년에도 이런 문화가 대세였다.

당시 봉선사는 살림이 매우 어려워서 서울 봉은사에서 쌀을 가져다 먹고 살았다. 행자들의 처소는 운하당(雲霞堂)의 큰 방이었다. 초격스님 외에 3명의 행자가 함께 지냈다. 평등공양이 이뤄질 수 있는 생활문화가 사찰에 남아 있었다. 행자에게 독방을 준 것은 불과 몇년 되지 않았다. 선방도 독방을 주는 것이 요새의 세태다보니 행자의 독방이라고 특별히 어색할 것이 없다.

지금 봉선사는 매주 월요일 아침공양을 발우공양으로 하고 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많이 간소화됐다. 초격스님이 행자와 사미로 있을 때는 매일 아침과 점심공양이 발우공양이었다. 새벽예불은 모든 대중이 함께 했다. 누구라도 새벽예불을 빠지면 아침 발우공양 시간은 한없이 길어졌다.

새벽예불에 참석하지 않은 이는 대중참회를 해야 했고, 공양도 받을 수 없었다. 봉선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었던 월운스님은 길고긴 소참법문으로 혼을 냈다. 초격스님은 말이 법문이지 잔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흐르고보니 그것이 출가수행자에겐 두번 다시 접할 수 없는 큰 가르침이었다고 했다.

#3

초격스님은 3년 동안 월운스님을 시봉했다. 월운스님은 누구도 6개월을 버티지 못했건만 3년을 버틴 시자에게 초격(超格)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초격이라는 법명에는 월운스님의 깊은 혜안과 애정이 담겨 있다. 행자 때부터 격을 뛰어넘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출가사문으로서 격을 뛰어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어준 법명이다.

사진 속 사미 신분이었던 초격스님의 의제는 일반 승복과 다르지 않다. 종단사를 잘 모르는 이들은 사미가 사미의제를 하지 않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당시의 사미의제는 지금과 달랐다. 가사빛 띠를 두르는 사미의제는 1994년 종단개혁 이후 본격적으로 시행된 제도다. 초격스님이 출가한 1980년대에는 사미와 행자에게 의제를 강제하지 않았다.

초격스님은 두달 전 아흔세번째 생신을 맞은 월운스님과 사진을 찍었다. 시자를 불러 사진을 찍었던 1988, 성성한 목소리로 시자를 나무라던 월운스님과의 사진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지금은 제25교구본사 봉선사 주지가 된 시자는 알듯 모를듯한 표정으로 긴 생각에 잠겼다.

봉선사=박봉영 기자 bypark@ibulgyo.com

[불교신문3555호/2020년2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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