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인을 위해 묻고 후학을 위해 답하다

용성스님과 만공스님이 나눴던
“어묵동정을 여의고 이르라”

다음세대인 전강스님과 혜암스님이
선문답에 대해 의견이 갈리는데…

1968년 7월21일부터 8월11일까지 불교신문 ‘금주의 설법’ 지면을 통해 당대의 선지식인 혜암스님과 전강스님의 선문답이 오고 갔다. 시작은 용성스님과 만공스님의 ‘어묵동정을 여의고 이르라’는 선문답 이야기에 대해 스님은 어떻게 답하겠냐는 혜암스님을 찾아간 한 납자의 질문에서 비롯됐다. 두 분 선지식의 지면을 통한 날이 서 있는 공방은 불교신문에서도 귀한 자료이다. 창간 60주년을 맞아 당시 선객들의 활발발한 시대모습을 전하기 위해 본지 258~260호에 실린 혜암스님과 전강스님의 법문을 소개한다.

1886년 태어난 혜암스님은 12세에 출가했다. 45세 때 수덕사 조실 만공스님에게 전법을 받고 1956년 72세에 수덕사 조실, 1980년 덕숭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추대됐다. 1985년 5월19일(음력 3월30일) 수덕사 염화실에서 법납 89년, 세수 101세로 열반에 들었다. 
1886년 태어난 혜암스님은 12세에 출가했다. 45세 때 수덕사 조실 만공스님에게 전법을 받고 1956년 72세에 수덕사 조실, 1980년 덕숭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추대됐다. 1985년 5월19일(음력 3월30일) 수덕사 염화실에서 법납 89년, 세수 101세로 열반에 들었다. 

1968년 7월21일자(불교신문 258호) 
혜암스님의 ‘금주의 설법’

어느 날에 납자일인(納子一人)이 수덕사(修德寺) 조실(祖室)에 들어와서 혜암(惠庵)노스님에게 예배(禮排)하고 묻기를 “소승이 노스님께 법문을 듣고자 하여 불원천리하고 찾아왔는데 법문 말씀을 하여 주시겠습니까?” 하니 “늙은 사람이 무엇을 알겠나마는 성의가 고마우니 생각나는 대로 물어보게” 하였다. 
<…중략…> 
“또 한가지 묻겠습니다. 서울 대각사에 계시는 용성(龍城)스님께서 만공(滿空)스님께 묻되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 이르라” 하자 만공스님께서는 무언침묵(無言沈默)을 하고 계셨습니다. 용성스님이 “그러면 양구(良久)란 말이요” 하니 만공스님은 “아니요”라고 하셨답니다. 그 뒤에 전강(田岡)스님이 만공스님께 사르기를 “큰스님들께서 하신 일이 서로 다 멱살을 잡고 진흙구덩이에 들어간 격(格)입니다”라고 하니 만공스님께서 “그러면 자네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전강스님이 대답하되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 무엇을 이르란 말이요” 하였다고 하니 노스님은 어떻게 답(答)을 하시겠습니까?”

“왜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는 이르는 법(法)이 없단 말인가? 누가 나에게 어묵동정(語默動靜)을 여의고 이르라고 한다면 나는 ‘파기성정(破器成鼎)이라고 하겠네. 파기(破器)로 다시 시루를 만드는 것과 같다는 말일세” 하였다. 

납자(納子)가 또 묻기를 용성(龍城)스님이 도봉산(道峰山) 망월사(望月寺)에 조실(祖室)로 계실 때에 용성스님이 제방(諸方) 선지식에게 묻기를 “<비유경>에 보면 어떤 사람이 코끼리에게 쫓겨서 달아나다가 피할 수가 없어 고정(古井)에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등칙나무가 나서 고정(古井) 밖에 있는 나무와 같이 커서 고목(古木)이 되었다. 쫓기던 사람은 등칙나무를 잡고 매달려 있자니까 동서사방(東西四方)으로 독사(毒蛇)가 있어서 고개를 들고 물려고 하고 정저(井底)에는 청룡(靑龍)이 있어서 잡아먹으려고 기어올라오고 등칙나무 위에는 백서(白鼠:흰쥐)와 흑서(黑鼠)가 번갈아가며 등나무를 쏠고 있는데 나무위에 꿀방울(密滴)이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이 떨어져서 입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모든 공포를 다 잊어버리고 매달려 있다는 인생무상(人生無常)에 대한 비유담이 있으니 꿀방울을 먹던 사람이 어떻게 하면 살아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만공스님은 “작야몽중사(昨夜夢中事)니라”하고 혜봉(慧峰)스님은 “불불능원작불(佛不能原作佛)이니라”하였고 혜월(慧月)스님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으니 염득불명(念得不明)이니라”고 하였고 용성스님은 자답(自答)하되 “표화(瓢花)가 철리출(徹籬出)하야 와재마전상(臥在麻田上)이니라” 하고 보일(寶日)스님은 “하시입정(何是入井)”이라고 했고 고봉스님은 “아야 아야”라 하고 전강스님은 “달다”라고 하였다 하오니 노스님은 이에 대하여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누가 나에게 그런 것을 묻는다면 문자(問者)가 상신실명(喪身失命) 하리라고 답(答)하겠노라” 하니 납자가 큰절을 하고 물러갔다. 
 


1898년 태어난 전강스님은 16세에 출가, 25세 되던 해에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었다. 33세에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후 법주사, 망월사, 범어사, 동화사 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수좌들의 정진을 도왔다. 1975년 1월13일(음력 12월2일) 용화선원에서 법납 61세, 세수 78세로 열반에 들었다.
1898년 태어난 전강스님은 16세에 출가, 25세 되던 해에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었다. 33세에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후 법주사, 망월사, 범어사, 동화사 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수좌들의 정진을 도왔다. 1975년 1월13일(음력 12월2일) 용화선원에서 법납 61세, 세수 78세로 열반에 들었다.

1968년 8월4일자(불교신문259호) 
전강스님의 ‘금주의 설법’
 

내가 25세 때에 만공조실 스님에게 들어가 뵈었더니 만공스님이 나에게 묻기를 “저 하늘에 가득한 별들 가운데서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하시니 내가 곧 엎드려서 땅을 더듬는 시늉을 하니 만공스님께서 “선재선재(善哉善哉)라” 하시고 곧 나에게 게송을 지어주었다. 

佛祖未會傳
我亦無所得
此日秋色暮
猿嘯在後峰

“불조가 못 전한 것 나 또한 얻음 없네. 이날은 가을빛도 늦어 가는데 뒷산 봉우리에 원숭이 울음소리.”

내가 이렇게 만공스님께서 법을 받은 것은 사실대로 금일 법문하였다. 

제방선덕(諸方禪德)들은 한번 착안간(着眼看)하여 볼지어다. 육조 스님의 적손(嫡孫)이신 마조(馬祖)스님은 남악(南嶽)에서 좌선(坐禪)만 하면서 처음에는 좌복 7개나 뚫었다. 좌(坐)에 집착(執着)되고 마치 죽은 사람 같고 또한 목석으로 만든 동상 같았다. 그때 회양선사께서는 조금도 진전이 없는 것을 보시고 묻기를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니 마조스님이 답하기를 “좌선합니다” 또 회양선사께서 묻기를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가?”하니 마조스님의 답이 “부처가 되려고 좌선합니다”라고 하였다. 회양선사께서는 더 묻지 않고 그 다음날부터 마조스님 앞에서 기와장을 갈고 있었다. 

참선(參禪)을 하다가 이상한 지견(知見)이 나타나도 다 버리고 계속 화두만 해 들어가다가 정법을 척 들으면 먼젓번의 경계는 버려야 한다. 기와장 가는 소리를 듣다 뭣한 마조스님은 회양선사에게 그 까닭을 묻되 “스님 기와장을 갈아서 무엇하렵니까” 하니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마조스님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기와를 갈아서는 도저히 거울이 될것같지 않아서 의심이 커서 또 묻기를 “기와를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하니 회양선사는 곧 “그러면 기와를 갈아서 거울이 안되면 앉아 있어서 부처가 될 줄 아는가?”하시면서 “우차가 가지 않을때에 소를 때려야 되겠는가 수레를 때려야 하겠는가”하는 말에 마조스님은 확철대오(廓徹大悟)하였다. 이것이 바로 언하대오(言下大悟)인 것이다. 

선사의 일구(一句)는 그대로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 활구(活句)인 것이다. 

일체 선악경계(善惡境界)에 분별이 없고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면 참다운 선이며 반듯이 간화선(看話禪)을 하여야 한다. 

화두를 참구하는데는 말길도 없고 이치(理致)길도 없다. 또 듣고 알수 없고 생각하여 알수도 없다. 그러니 알 수 없는 그 하나(話頭)를 용맹스럽게 꼭 잡고 의심(疑心)을 매(昧)하지 말아야 필경에는 그 의심이 잡혀 들어와 뚜렷하게 나타나며 그 의심 전체가 한 덩어리 되어 내외가 없고 동서가 없으며 또한 백만 인중에 있어도 한사람도 있는 줄 모른다. 

내가 23세 때에 직지사에 있었는데 그때 청법(請法)을 받고 70명 대중에게 결제법문 한 것을 한번 말하겠다. “차사(此事)는 개구즉착(開口則錯)이다. 착불착(錯不錯)은 차치(且置)하고 여하시(如何是) 차사(此事)냐?”이렇게 대중에게 물었더니 그때 구참스님이 답하기를 “촛불은 밝으니라”고 하였다. 나는 곧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치고 “착(錯)이니라”하였다. 

또 이 문제를 만공스님에게 물었더니 만공스님께서는 보내왔다. 이것이 나의 상당 첫 법문이다. 금일 대중들도 한마디씩 일러 볼지어다. 

요즈음 수좌들이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그 전에 용성스님께서 만공스님에게 묻기는 어묵동정을 여의고 이르라고 하였는데 만공스님께서는 양구(良久:무언침묵)를 하셨다. 용성스님은 만공스님에게 “양구를 하시는 것인가”라고 물으니 만공스님은 “아니요”라고 하신 법담(法談)이 있는데 그 후 만공스님은 나에게 묻기를 “자네는 어떻게 이르겠는가?” 내가 곧 답하기를 “어묵동정을 여의고 무엇을 이르라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그런데 수일 전 혜암스님은 “왜 어묵동정을 여의고 이르는 법이 없단 말인가?”하고 ‘파기성정(破器成鼎)’이라고 하였다 하니 즉 깨어진 그릇으로 솥을 이루었다 하니 좋은 말이다. 

그러나 어째 파기성정(破器成鼎)으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대사를 마쳤다 하겠는가? 

내가 학인들을 위하여 금일 혜암스님에게 묻겠으니 “깨어진 그릇으로 솥을 이루었다고 하니 무슨 솥을 이루었는가” 

혜암스님께서는 곧 답이 있기를 바란다. 

전강 흥문관 조실(田岡 興門關 祖室) 
 


1968년 8월11일자 (불교신문260호) 
혜암스님의 ‘금주의 설법’

지난 8월4일자(불교신문259호) 금주의 설법에서 전강스님이 혜암스님 법문에 대한 답을 물었다. 전강스님 물음에 대하여 혜암스님은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편집자주> 

답: 용성스님이 만공스님께 묻기를 어묵동정을 여의고 법을 일러보라고 하니 만공스님께서 아무 말이 없이 가만히 있었다. 

이때 용성스님이 만공스님을 보고 양구(良久:그냥 가만히 있는 것)를 하시는 것이냐 물으니 만공스님이 아니요, 지금 뜻이 다른 데가 있다고 하였다. 이 법담에 전강스님은 “어묵동정(語黙動靜)을 여의고 무엇을 이르라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어묵동정을 여의고 이르라면 혜암은 파기상종(破器相從)이라고 답하겠다. 전호 신문에 게재된 파기성정(破器成鼎)은 파기상종(破器相從)의 오기(誤記) 그러므로 전강스님 물음에 대한 답은 그대로 또 파기상종이라고 즉 어묵동정을 여의고 이르라면 파기상종이라고 답하겠다. 

또한 불교신문 5월20일자 전강스님 법문(言下의 大悟) 중에 혜월스님이 문(問)하기를 “영지(靈智)에 공적영지(空寂靈智)를 일러라”하였다. 이 법문에 전강스님 답하기를 “안볼래야 안볼수 없고 볼래야 볼 수 없습니다” 하였다.  

만일 혜암이 답한다면 공적령지(空寂靈智)이라 그런고로 영불리지(靈不離智)하고 지불리령(智不離靈)이라 필경에 여하(如何)오 무각철우대왕(無脚鐵牛大王:다리없는 철소가 큰 하늘을 달리노라)

또한 혜월스님이 문(問)하기를 “공적령지등지(空寂靈智等持)를 일러라”하였다.

이 법문에 전강스님 답하기를 “낙하(落霞)는 여고목제비(如枯木霽飛)하고 추수(秋水)는 공장천일색(共長天日色)입니다”라고 답(答)하였다.

만일 혜암이 답한다면 “천시과(穿市過) 한다(복잡한 시장을 뚫고 지나갔다)”고 답(答)한다.

또 용성스님이 묻기를 “자네가 전신(轉身)을 했는가”하였다. 

이때 전강스님 답하기를 “일락서산(日落西山)에 월출동(月出東)이라” 하였다.

만일 혜암이 답한다면 “풍동(風動)에 심요수(心搖樹)이니라(마음나무가 흔들린다)”고 하겠다.

또 용성스님이 묻기는 “여하시제일구(如何是第一句)냐” 하였다. 전강스님이 답하기를 고성(高聲)으로 “예?” 하였다. 용성스님이 또 묻기를 “여하시제일구냐” 전강스님이 또 답하기를 “박장대소(拍掌大笑)라” 하였다. 이때 용성스님이 ”아니다“ 하였다.

전강스님이 “그럼 어떤 것이 제일구(第一句)입니까?” 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혜암은 전강스님과 같이 “어떤 것이 제일구(第一句)입니까” 하고 묻지 않고 혜암은 용성스님께서 자과를 부지하시고 무엇을 또 다시 이르라고 하시는고 하며 용성스님이 어떤 것이 제일구(如何是第一句)냐고 물으면 혜암은 답하기를 “하불문제일구(何不問第一句)이니고”라고 답한다.

또 한암(漢岩)스님이 묻기를 육조(六祖)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컬었지만 나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자네는 어떻게 하였으면 인가를 받겠는냐고 전강스님을 보고 물었다.

전강스님 답하기를 “합소삼하(合笑三下)”하고 편거(便去)하였다. 만일 혜암이 답한다면 “여하수지(如何守持)이니고”라고 다시 묻겠노라.

전강스님 묻기를 “조주무자의지(趙州無子意旨)는 천하선지의(天下善知識)이 반(半)도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혜봉(慧峰)스님께서는 무자의지(無子意旨)를 반만 일러주십시오” 하였다. 혜봉스님이 답하기를 “무(無)”라고 하였다. 전강스님이 다시 묻기를 그것이 어째 반이 됩니까 하였다.

다시 혜봉스님이 전강스님 보고 묻기를 “어떻게 일르면 반(半)이 되는가”고 물었다. 전강스님이 답하기를 “무(無)”라고 답하였다.

만일 혜암이 답하면 전강스님이 “무”한대 대하여 “혜봉노사(慧峰老師)가 도적에게 실명(失命)하였다”고 답하며 무자의지(無子意旨)를 반(半)만 일르라고 하면 혜암은 “양편성(兩片成)이라” 하겠노라. 금일 학인을 위해 설하노라.

혜암 수덕사 조실(惠庵 修德寺 祖室) 

정리=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3552호/2020년1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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