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2> 고구려 불상 ① 고구려 왕경 평양의 불상
[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2> 고구려 불상 ① 고구려 왕경 평양의 불상
  • 배재호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 승인 2020.01.24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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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뚝섬서 출토된 금동불좌상…법의 걸치고 선정인

372년 소수림왕대 불교전래
광개토왕 평양 9개 사찰 창건

4~5세기 불상 전해지지 않아
장천1호 고분벽화 통해 추측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과 유사

현존 最古 연가칠년명 금동불
돈황서 유행한 천불사상 영향
고구려 5세기 전반에 조성된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은 높이 5㎝로 장천 1호 고분 예불도 속 불상처럼 사자가 표현된 방형 대좌 위에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선정인을 하고 있다.
고구려 5세기 전반에 조성된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은 높이 5㎝로 장천 1호 고분 예불도 속 불상처럼 사자가 표현된 방형 대좌 위에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선정인을 하고 있다.

고구려 불상은 남아 있는 수가 적고, 관련 기록도 빈약하여 불상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2)에 전진(前秦, 351~394)의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엔 아도(阿道)를 보내어 불교와 불상을 전하였다. 375년, 소수림왕은 이들을 위해 초문사(肖門寺 또는 성문사 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웠는데, 가져왔던 불상들은 아마 이곳에 모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들은 감숙성 양주(凉州)에서 인도 불상의 영향을 받아 4세기 후반에 성립된 양주 모식(凉州摸式)의 불상이거나 전진의 수도 장안(長安, 현재 서안)에서 조성했던 인도식 금동불상이었을 것이다. 고구려가 전진에서 불교와 불상을 받아들인 것은 공식적인 외교 관계에 의한 것이지만, 양주모식과 인도식 불상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393년(혹은 392년)에 멀지 않아 천도할 평양에다 9개의 사원을 창건하였다. 이들 사원에 봉안되었던 4세기 말의 불상은 덕흥리 고분(408년)에 묵서된 것과 같은 “석가문불(釋迦文佛, 석가모니불상)”로 추정된다. 불상들은 비슷한 시기의 감신총 전실에 그려진 묘주인이 앉은 연화대좌나 5세기 전반의 장천 1호 고분의 불좌상의 방형 대좌와 같은 모습의 대좌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감숙성 주천(酒泉)시의 정가갑(丁家閘) 5호 고분(400년경)의 궁륭형 천장과 닮은 덕흥리 고분 전실의 천장은 고구려 고분의 일반적인 천장 구조인 요령성 고분의 모죽임식 천장과는 달라서 9개나 되는 사원을 평양에 조성할 때, 마스터플랜을 제공했을 법한 사람들이 정가갑 고분을 축조했던 감숙성 출신의 사람들과 관련될 가능성을 추측하게 한다.

427년,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왕경을 평양으로 옮길 때 동명성왕릉(東明聖王陵)을 이장하면서 능사(陵寺)로서 정릉사(定陵寺)를 건립하였으며, 498년(문자왕7)에는 금강사(金剛寺)를 조성하였다. 정릉사와 금강사에 봉안했던 5세기 불상들은 지금은 사라져 구체적인 모습을 알 수가 없다. 

한편 5세기 전반에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 장천의 1호 고분 벽면에 그려진 예불도(禮佛圖)는 왕경 평양에서 조성된 5세기 불상의 전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고분의 후실에는 예불도와 함께 연화화생상(蓮花化生像), 비천상(飛天像),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 전실 입구 양쪽 벽면에는 각각 4존의 보살입상이 그려져 있다. 예불과 연화화생 장면은 당시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예불법과 연꽃에서 태어나는 정토왕생의 관념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예불도의 불상은 양측에 사자(獅子)가 표현된 방형 대좌 위에서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선정인(禪定印)을 결한 채 가부좌하고 있다. 불상의 오른쪽에는 승려를 필두로 한 불교도의 예불 행렬이, 왼쪽에는 오체투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예불 행렬은 양주 모식의 영향을 받아 서진(西秦)의 420년 무렵에 그려진 감숙성 난주(蘭州)의 병령사(炳靈寺)석굴 169굴의 예불도에서도 확인된다.

예불도에 보이는 사자가 표현된 방형 대좌 위에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선정인을 결한 채 가부좌한 불상은 서울 한강의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에서도 확인된다. 불상의 국적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5세기 전반에 우리나라에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불좌상은 하버드대학미술관 소장의 금동불좌상과 중국 하북성 석가장(石家莊)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 등 중국의 4세기 불상들과 많이 닮았다.
 

현존하는 고구려 불상 중 가장 이른 시기 조성된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은 539년에 만들어졌으며 높이 16.3㎝ 크기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고구려 불상 중 가장 이른 시기 조성된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은 539년에 만들어졌으며 높이 16.3㎝ 크기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고구려 불상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539년에 평양에서 만든 연가칠년명(延嘉七年銘) 금동불입상이다. 광배 뒷면에는 “연가칠년 기미년에 고려국(高麗國, 고구려국) 낙랑(樂浪, 평양)의 동사주(東寺主)이면서 (석가모니 붓다의) 제자인 승연(僧演)이 사도(師徒, 문도 門徒) 40명과 함께 현겁천불(賢劫千佛)을 만들어 유포하였는데, (현겁천불 중) 29번째 붓다인 인현의불(因現義佛)은 비구 ○○(판독 불가)가 조성한 것이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불상은 “기미년”의 간지(干支)와 조형적인 특징을 통해 고구려 539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불입상은 통견 방식으로 두꺼운 법의를 입고 커다란 연꽃잎 모양의 광배를 배경으로 다리를 살짝 벌린 채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려 손바닥을 앞으로 내 보인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왼손은 자연스럽게 내려뜨려 역시 손바닥을 앞으로 내 보인 여원인(與願印)을 결하고 있다. 불상은 비교적 늘씬한 모습에 적절한 신체 비례를 갖추고 있다.

장방형의 얼굴과 길쭉한 귀, 좌우대칭을 이루며 양옆으로 펼쳐진 법의, 가슴 앞을 가로질러 왼쪽 어깨가 아닌 팔위로 넘어간 법의 자락 등은 북위(北魏)의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까지 조성된 금동불입상에서도 보이는 특징이다. 그러나 이 시기 북위 불상에 많이 보이는 신(紳, 옷고름)이 없고, 부드러운 얼굴 표정과 도톰한 대좌 연판에서 이미 고구려화된 것을 알 수 있다. 

불상은 평양 동사주(東寺主)인 승연의 제자가 만든 인현의불이다. 인현의불은 불교적 개념의 현재 즉 현겁(賢劫)에 계시는 천분의 붓다 중에서 29번째 붓다이다. 참고로 석가모니 붓다는 현겁 천불 중에서 네 번째 붓다이다. 천불(千佛)사상은 중국 초기불교의 중요 거점이었던 감숙성 양주와 돈황(敦煌)에서 유행하였다.

북위가 양주(439년)와 돈황(442년)을 점령한 후, 이 지방의 3만호(萬戶)를 수도인 산서성 대동으로 강제 이주시킴에 따라 천불사상도 이곳으로 전파되었고, 494년에 북위가 하남성 낙양으로 천도한 후에는 다시 그곳으로 확산되었다.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은 이러한 과정에서 고구려까지 전해진 천불사상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고구려의 천불사상은 1937년, 평안남도 평원군 덕산면 원오리 절터에서 발굴된 204편의 소조불좌상(塑造佛坐像)과 108편의 소조보살입상에서도 확인된다. 이들 존상은 틀로 찍어서 만든 후 가마에서 구워낸 다음 채색을 입혀 완성하였다. 불좌상은 장천 1호 고분의 불좌상과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과 같은 형식이다. 불상들은 고구려 6세기 중엽에 사원 금당(金堂, 법당)의 벽면이나 목탑의 표면을 장식하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7세기에 조성된 평천리 출토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은 17.5㎝로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다. 반가사유상 조형적 특징은 북제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 7세기에 조성된 평천리 출토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은 17.5㎝로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다. 반가사유상 조형적 특징은 북제에서 찾을 수 있다.

한편 평양 평천리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7세기 초의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은 반가(半跏) 자세로 앉아서 사유에 잠긴 모습을 하고 있다. 반가는 주로 연화대좌 위에서 가부좌한 다리 중 왼쪽 다리를 풀어서 내려뜨리고 오른쪽 다리의 발목을 왼쪽 다리 허벅지 위에 올린 반가부좌의 줄임말이다.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은 오른팔의 일부가 없어졌으며, 왼손은 길게 뻗어 오른발 발목을 잡고 있다. 머리 뒤편에는 두광(頭光)을 결합하던 광배 촉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반가사유상에서는 정적인 분위기의 얼굴 표정과 활달하게 표현된 하체의 법의 자락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오른발 발목을 잡기 위해 살짝 꺾은 왼손 손목과 잔뜩 힘이 들어간 오른발 발가락에서 수준 높은 표현력을 엿볼 수 있다.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의 조형적인 특징은 북제(北齊)의 반가사유상에서 찾을 수 있다. 반가사유상이 조성된 7세기 초에 북제는 이미 멸망하여 없어진 왕조였지만 고구려 불상에 영향을 미친 6세기 후반 북제 불상의 조형이 7세기 초에도 평양에서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576년(평원왕16)에 고구려의 대승상인 왕고덕(王高德)이 의연(義淵)을 북제의 수도 업성으로 보내어 북제 불교계의 도통(都統)이자 정국사(定國寺) 승려인 법상(法上, 495-580)에게 공부하게 한 사실은 6세기 후반 고구려에 미친 북제 불교와 불상의 영향이 상당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구려의 왕성 평양에서 조성된 불상들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의 북조(北朝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장천 1호 고분의 예불도는 병령사석굴 169굴의 예불도와 닮았고,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과 원오리 출토 소조불좌상은 감숙성 돈황과 양주 지방에서 유행했던 <불설불명경(佛說佛名經)>의 천불사상과 관련된다. 북제의 반가사유상을 조형적으로 답습한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은 북조 불교계에서 승려들의 선관(禪觀) 수행의 대상으로 많이 조성되던 보살상이었다.

[불교신문3552호/2020년1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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