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사찰 · 고승의 도장을 만나다
일제강점기 사찰 · 고승의 도장을 만나다
  • 이성수 기자
  • 승인 2020.01.1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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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선지식 무불스님 ‘집인첩’ 선보여
일제강점기 사찰과 고승의 직인 등이 담긴 무불스님의 '집인첩'
일제강점기 사찰과 고승의 직인 등이 담긴 무불스님의 '집인첩'

일제강점기 금강산 표훈사, 장안사, 유점사 등 전국 주요사찰의 스탬프와 고봉경욱(古峰景昱, 1890~1961), 초부적음(草夫 寂音, 1900~1961), 만응(卍應) 스님 등 당대 고승의 직인을 한 권에 담은 자료가 나와 화제가 되고 있다.

독립운동에 참여해 일본 경찰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출가 이후 참선과 사경(寫經)으로 수행한 무불(無佛, 1907~1984) 스님의 <집인첩(集印帖)>이 최근 공개됐다. 크기는 290cm × 11cm, 총 52페이지로 돼 있다.

<집인첩>에는 평남 평양부 창전리 159번지에 자리한 유점사평양포교소 직인 및 고무인을 비롯해 석왕사, 보덕암 등 금강산 사찰과 천축사, 영화사, 봉은사 등 서울 근교 사찰, 그리고 불국사 등 전국 사찰 70여 곳의 인장(印章)이 실렸다.
 

직인 대부분은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 모양에 한문으로 사찰 명을 담았다. 하지만 참배 기념으로 제작한 스탬프에는 만(卍)자, 거북이, 범종을 표시한 사찰이 여럿이다. 특히 금산사는 미륵전과 탑, 불국사는 다보탑, 석굴암은 불상, 장안사는 사찰 입구의 만천교(萬川橋)를 표현했다.

세계홍만자회(世界紅卍字會) 조선주회(朝鮮主會) 서무부(庶務部) 직인도 눈길을 끈다. 중국에서 태동한 세계홍만자회는 비밀결사체로 인 홍만교(紅卍敎)에 소속된 자선단체로 산동성을 중심으로 1910년대 중반에서 1920년대 말까지 활동했다. 조선주회는 현대어로 ‘조선지부’와 같은 의미로 세계홍만자회에 조선인이 참여한 사실을 증명한다.

이와 더불어 무불스님의 <집화첩>에는 1930년대 경성(서울)에 자리한 화신(花信), 미스코시(三越), 미카나이(三中正) 백화점의 스탬프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경매회사 코베이 옥션에서 무불스님의 <집인첩>을 구입한 불교사회정책연구소장 법응스님은 “이 자료에 담겨있는 다양한 내용들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단면과 시대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특히 직인은 사찰 인장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근대 불교사를 연구하거나 관련 사찰 등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공개하게 됐다”고 밝혔다.
 

노년의 무불스님.
노년의 무불스님.

2010년 8월 14일 불교신문에 실린 무불스님 행장

1907년 9월 20일 지금의 서울시 중구 오장동 23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 남영철(南永哲) 선생, 모친은 최씨(崔氏). 속명은 남점룡(南點龍).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성장했으며, 한학(漢學)을 공부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불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4세 되던 해. 출가동기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계룡산 동학사에서 월암(月庵)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사문이 되었다. 동학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면서 불가의 진리를 익히고 사미계를 받았다. 비구계는 1931년 8월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스님을 계사로 수지했다. 동학사 백초월(白初月)스님 문하에서 사집과를 마친 것이 1931년 1월이었다. 이후 금강산으로 주석처를 옮겨 설호(雪湖)스님에게 사교과를 수료한 때는 1936년 1월이다. 이어 1938년 1월 경성의 개운사에서 박한영(朴漢永)스님 회상에서 대교과를 마쳤다.

당대 강백들의 지도를 받은 무불스님은 계룡산 동학사(1940년9월~1943년2월)와 금강산 유점사(1943년2월~1944년1월)에서 강사(講師, 지금의 강주에 해당) 소임을 보며 후학을 가르쳤다. 이른바 대동아 전쟁이라며 침략전쟁에 혈안이 된 일본 제국주의는 젊은이들을 강제동원하기 위한 일환으로 조선 전역의 강원을 폐쇄했다. 이때 유점사도 강제 폐문(閉門)이 되어 스님은 강사직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스님은 걸망 하나에 의지한 채 전국을 주유(周遊)했다. 이 과정에서 왜경(倭警)에게 붙잡혀 봉변을 당한 후 몸이 심하게 상했다. 척추를 다친 스님은 이후 사경(寫經)과 참선(參禪)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정진했다.

금강산에서 정진할 무렵 대륜(大輪)스님을 법은사로 모신 스님은 1951년 부산 동래 금정선원장과 1957년 동래포교당 주지를 지냈다. 1970년 부산 연화사를 창건했고, 1973년 동래 금용암 주지로 포교 일선에서 수행 정진했다. 스님은 1984년 2월 약간의 병환을 보이다, 같은 달 11일(음력)에 원적에 들었다. 법납 64세, 세수 80세. 영결식은 부산 금용암에서, 다비식은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엄수됐다.

스님은 입적을 예감하고 “부처님의 은혜와 시주 은혜를 다 갚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라면서 “사리를 절대 거두지 말라”고 당부했다. 제자로는 종학스님(부산 불광사)과 지허스님(김해 황룡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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