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절제하고 배려하기에 자연스레 원융산림이 된다

수처작주…수행기관 두루 갖춰진 종합도량
‘깨달음의 주체’ 되려는 주인공들로 빼곡해

선행스님
선행스님

글자대로라면 갖가지 나무들로 빼곡히 들어선 숲이 총림(叢林)이다. 이처럼 승가에서 각종 수행기관과 종무소 그리고 대중들이 두루 갖춰진,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도량이 총림이다.

총림에서는 정진대중 못지않게 종무소를 비롯한 여러 수행처소의 소임자만해도 인원이 상당하다. 거기에 흔히 뒷방 대중(?)이라고 해서 요사채에 주석하고 있는, 소임을 역임한 경력 있는 스님들 그리고 정진을 두루 했거나 승납이 오래된 스님들을 통틀어 한주(閑主)라고 한다. 그 중에 원로나 노스님만큼은 예외다. 

그동안 강원에서 공부한 이래로 강산이 세 번 변하는 동안 제방을 만행했다. 그래서일까 주변의 권유와 사중의 배려로 지난해 통도사에 주석하면서 용상방(龍象榜)에 한주로 등재되었다. 돌고 돌아 제자리에 온 심정이다. 어쩌면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지냈다고 해야 할까. 

학인시절 그분들이 아득히만 보였는데 막상 그 위치가 되고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특정한 소임이 없어 조금은 여유가 있을 듯해도 조신(操身)해야 할 일이 많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싶다.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대중생활의 묘미다. 흔한 말로 너무 튀거나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절제와 배려하는 마음으로 화합하기에, 마치 용광로에서 광물이 용해되듯 자연스레 원융산림이 된다.

본래 한주는 한인(閑人)의 의미가 있다. 한가한 사람. 특히 선가(禪家)에서는 공부를 마치고 마음까지 내려놓고 쉬어서 한경지에 오른 이를 말한다. 해서 선원에서 정진하는 큰 방 입구에 한인물입(閑人勿入)이라는 편액이 있다. 공부에 한 경지 올라 마음을 쉬고 헐떡임이 없는 이는 정진 방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어찌 공부에 끝이 있겠는가. 늘 정진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경책이겠다.

통도사에는 규모만큼이나 한주 스님도 많다. 수행과정이 단순해서 경륜이 일률적일 것 같아도, 지나온 여정이 그리 단조롭지 않다. 해서 한가할 듯 해도 저마다 지내온 수행 이력에 따라 일상이 조금은 차별이 있다. 기도와 주력으로 일관하는 스님. 간경과 독송에 전념하는 스님. 때때로 법회의 법사로 초청 받아 설법하는 스님 그리고 홀로 정진하는 스님 등 다채롭다. 

조금은 이르다 싶지만 지금의 심정은 ‘조용히 갈무리’하고픈 심사(尋思)다. 갓 출가해서는, 20년쯤 정진하고 걸망 하나에 의지하여 주유천하(周遊天下)하기를 꿈꾸었다. 꿈만 같았다. 돌아보면 아쉬움이 많았어도 마냥 꿈같은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정진 처소를 헤매듯 찾아다닌 것이 나름의 위안이다. 뭇 도량을 자주 옮겨 다니다 보니 주위에서 핀잔에 가까운 말을 듣곤 했어도 그다지 여한이 없다.

평소 좋아하는 문구가 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곧 어디에서든 깨달음의 주체가 되라는 뜻이다. 거기에 의미를 더해 봤다. 누구나 갖고 있는 능력과 역량이 다를진대, 능력껏 역량껏 최선을 다하는 그 사람이 바로 주인공이라고. 또한 타고난 역량이라면 말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는 이가 주인공이리라. 그 주인공들이 화합하고 어우러져 원융산림으로 이루어진 도량이 총림이다.

통도사 일주문 앞 양옆에 세워진 석주(石柱)에 새겨진 문구다. 방포원정상요청규(方袍圓頂常要淸規) 이성동거필수화목(異姓同居必須和睦) 삭발하고 가사 입은 출가인은 항상 청규를 준수하고 각성바지가 모여서는 반드시 화목해야 한다. 

선행스님 영축총림 통도사 한주

[불교신문3551호/2020년1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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