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척 살아가도 삶 넉넉해져
바라는 게 없으면 두려움 없고
두려움 없으면 속을 일도 없어

혜인스님

두어 달 전 불교신문 창간 60주년을 맞아 새로운 연재를 부탁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반가웠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마음속에서 답이 내려졌다. ‘하고 싶다.’ 기자님의 생각과 당시의 내 상황이 참 잘 맞는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조심스러웠다. 나는 본래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신문 연재를 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나처럼 법랍이 짧은 스님이 연재하는 글은 본 적이 없기에. 잠시 고민 끝에 겸손을 떨었다.

“에이 제가 자격이 되나요.” “그럼요”라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괜한 질문들만 몇 차례 더 한 뒤, 좀 더 고민해보겠다는 대답으로 대화를 마쳤다.

기도를 시작하면서 생긴 새로운 습관이 하나 있는데, 무언가 선택이나 결정의 기로에 놓일 때 홀로 기도를 하며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와의 진솔한 대화만큼 결정에 도움을 주는 사람은 없다는 느낌이랄까.

본래는 잡념을 내려놓고 기도에만 집중해야 하는 게 정석이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 정리할 생각이 있다는 것을 핑계 삼아 이렇게 게으름을 피운다. 그날도 저녁 기도를 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 부끄러운 마음이 쑥 하고 올라왔다. ‘아직 어린놈이 무슨 신문 연재냐’ ‘기도하는 스님이 무슨 딴 생각이냐’ 하는 아직 듣지도 않은 상상의 비난에 두려워하고 있는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간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불교를 위한 것도, 중생을 위한 것도, 마음 써 제안을 해준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간 보기. 나는 언제부터 나를 위해 간을 보았는가.

물론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나도 먹고 사는 사람인데 뭐 간을 봐야지. 다만 여느 집을 가도, 여느 식당을 가도, 어디를 가도 누구든 남을 위해 간을 보는데, 나는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나는 두려움이 있어서 마음에 걸림도 있고, 뒤바뀐 헛된 생각에 빠져있었던 게 아닐까. 최소한 이것은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고자 하는 수행자의 자세는 분명 아닐 터. 나는 아직 오지도 않은 두려움 때문에 나를 속이고 있었다. 명색이 삭발염의하고 천일기도씩이나 한다는 사람이 무서워서 간이나 보고 있다니. 기자와의 짧은 대화가 이렇게 내게 속는 나를 또 한 번 마주하게 한다.

나를 속이는 내 모습을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왠지 모르게 남에게 속는 일에는 무뎌지게 된다. 철없던 시절, 남에게 속았다고 분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자발적으로 속아주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나를 속이는 나를 바라볼수록 남이 속이는 모습도 더 잘 보이는 법이지만, ‘무언가 내게 바라는 게 있어서 그렇겠지’ 하는 마음으로 모른 척 속아주며 살게 된다.

헌데 이 마음이 삶을 참 넉넉하게 해주는 것 같다. 나를 속이는 나도 아직 어찌할 수 없거늘, 남에게 속는다고 어찌할 것인가, 좀 속아주면 또 어떤가. 사람에겐 누구나 두려움이 있고, 바람이 있다. 그리고 두려움과 바람이 있으면 속이게 된다. 속이면 당장에 두려움을 피할 수 있고, 속이면 당장에 바람을 이룰 수 있게 되니까.

하지만 거기엔 항상 대가가 따르는 법. 그래서 바라는 게 없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속일 수가 없다. 내가 남에게 속지 않기를 바라지 않고, 남에게 속을까 두려워하지 않거늘, 속는 것이 뭐 대수라고. 두려움과 바람과 속임과 속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두려움과 바람과 속임과 속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것이 자비가 아닐까. 오늘도 이렇게 내게 미안한 일을 하나 만들었다.

혜인스님 고양 중흥사

[불교신문3551호/2020년1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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