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禪까지] <47> 설일체유부-무학위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禪까지] <47> 설일체유부-무학위
  • 등현스님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 승인 2020.01.17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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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도 다시 퇴타할 수 있는가?’
아라한과, 모든 잠재된 번뇌 끊어져


무학위 시해탈은 잠시해탈
지혜가 아직 완성되지 않아
번뇌로 과위 물러날 수 있어
등현스님
등현스님

아나함이 성취한 멸진정은 열반과 유사하다. 몸으로 증득하였기에 신증(身證, kāyasākșī)이라 하고, 상계(색계, 무색계)의 수혹 중 초선의 1품에서 유정천의 8품까지의 수혹을 끊으면 아라한 향, 9품의 수혹을 끊으면 아라한과라 한다.

신증을 얻은 아나함이 아라한과를 얻으면 양면해탈이라 하나, 멸진정을 얻지 못한 아라한은 혜해탈이라 한다. 또한 수혹을 모두 끊었으므로 누진지라 하며, 모든 잠재된 번뇌가 끊어져 더 이상 다른 과위를 얻지 않아도 되므로 무학이라 한다. 무학은 이기심이 사라졌기 때문에, 모든 중생과 유학으로부터 공양 받을 만 하므로 응공이라고도 한다. 

무학위의 해탈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시해탈(時解脫)과 불시해탈(不時解脫)이다. 시해탈은 때를 기다려야 반열반에 들 수 있는 것을 말하고, 불시해탈은 때를 기다리지 않고 원하는 대로 반열반에 들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선정에 자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과의 차이는 둔근(鈍根)은 믿음으로, 이근(利根)은 법에 대한 이해로 수행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5근 중 각각 신근과 혜근이 계발되고, 이들이 견도에 들면 수신행(隨信行), 수법행(隨法行), 수도위에 들면 신해(信解)와 견지(見至)로 각각 불려지고, 무학위에 들면 그들을 시해탈과 불시해탈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시해탈과 불시해탈은 첫 수행을 믿음으로 또는 법에 대한 이해로 시작한 것의 결과이다.

시해탈은 잠시해탈이라고도 하는데 퇴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고, 불시해탈은 긍극적으로 해탈을 성취하여 퇴타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므로 부동심 해탈(부동위)이라고 한다. 불시해탈은 누진지와 무생지의 두 가지 지혜를 얻었지만 시해탈은 누진지의 지혜만 발생하고 무생지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시해탈의 지혜는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시해탈의 아라한에는 다섯 종류가 있는데 퇴법, 자해법, 수호법, 안주법, 통달법이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수행을 시작한 신해(信解)의 종성이다. 퇴법(退法, parihāņadharmā)은 질병, 음식 등의 어려움을 만나면 수혹의 번뇌가 발생하여 과위로부터 물러나는 것을 말하고, 자해법(自害法)은 과위로부터 물러나는 것(퇴법)이 두려워 자살하는 이를 말한다. 이들은 견도 이후에 정진의 가행 또는 법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였던 이들이다.

셋째, 수호법(守護法)은 획득된 과위를 지키는 것을 말하는데 이들은 항상 가행의 수행을 하지만 법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였던 이들이다. 안주법(安住法)은 획득된 과위를 보호하지도 않고, 노력도 하지 않는 상태인데, 가행의 노력은 부족하지만 법에 대한 존중은 지극하였던 이들이다. 통달법(堪達法)은 법에 대한 존중과 가행을 모두 갖추었으므로 마침내 부동법에 도달하게 된다.

믿음으로 시작한 다섯 종류의 시해탈 아라한이 뒤로 물러날 때, 종성과 과위로부터도 물러난다. 그러나 견도에서 먼저 획득한 과위로부터는 물러나지 않는데, 이는 견도에 들 때 얻은 수다원 내지 아나함 경지를 말한다. 과위에서 물러나지 않는 이유는 견혹의 실체 없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량부는 시해탈 아라한의 퇴타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라한들이 “나의 생은 이미 다 하였고, 범행은 확립되고, 더 이상 후유를 받지 않는다”라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해탈 아라한들의 물러남을 현법락주(現法樂住) 즉 선정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설일체유부의 아라한에 대한 해석은 좀 더 인간적인데, 오직 부동위 즉 불시해탈의 아라한만이 위의 말씀에 부합되고, 시해탈은 병이나 음식 등 결핍된 조건들에 의해 아라한위에서 퇴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차 결집의 원인이 된 대천의 5사도 시해탈 아라한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처럼 오직 믿음으로 수행을 시작한 사람들은 법에 대한 이해로 전환하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하고, 결함이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불교신문3551호/2020년1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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