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롭고 싶다, 이제 그만….” 갓 스물을 넘긴 대학생의 일기장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문장. 지구의 축이 뒤흔들리는 듯 극심한 방황을 종식하고 드디어 출가수행자의 길을 선택한 그녀의 세간살이 정리 작업, 일기장 태우기였다.

갓난아기부터 해인사 암자에서 자라 일반 대학을 간 그녀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자랐을까? 말린 가을들꽃 책갈피 같이 영광의 봉우리와 절망의 낭떠러지 간의 널뛰기와 모순의 연속, 비밀스런 가슴의 언어들은 한 땀 한 땀 그토록 소중했지만, 눈부시게 영롱하지만 곧 사라질 아침이슬의 아름다움이었음을.
 

연등회에 참여한 서울대 불교학생회원들의 모습.
연등회에 참여한 서울대 불교학생회원들의 모습.

“이제 그만 조화롭고 싶다!”고 부르짖을 만큼 몹시 서럽고 고통스럽던 대한민국 땅을 살아내야 하는 스무 세 살 여자아이. 안팎의 시끄러운 입을 닫는 참다운 언어도단(言語道斷)으로 이끄는 길, 일기장 속 지난 ‘이야기들’이 다 태워지는 거대한 화염 속에서, 그녀의 붓다 꽃씨(Buddha seed)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해인사 산내암자에서 삭발염의한 후, 강원(講院)에서 부처님 일대시교 경전들을 공부했고, 결국 이 모든 말씀들이 다 ‘한 생각 본래 없음’으로 돌아가 부처 이루는 길 즉 참선을 하라는 뜻임을 깨닫자, 미련 없이 제방 선원으로 들어갔다. 출가 전엔 세상 고통 혼자 다 짊어진 듯 안 아픈 곳이 없던 그녀는, 출가 후 20년 간 ‘나’라는 감옥의 집을 벗어나오는 색다른 해탈감을 맛보느라, 선원의 좌복이라는 이 멋진 ‘집’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대로 앉아 좌선하다 죽어도 좋을 그런 호시절을 지내는 동안 세상이야 어찌 되든 관심 두고 싶지도 않았고, 관심 두지 않는 자체가 미덕인 나름의 ‘Dharma Ego(다르마 에고, 법상(法相)’에 갇혀, 지금 돌아보면 참 부끄럽지만, 잔뜩 힘을 주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허나 무쇠수갑이나 황금수갑이나 우리를 가둔다는 점에선 동일하지 않던가? 좌복 위에 앉아 간절하게 묻고 또 물어 얻은 것은 과연 어느 세상의 이야기였던가?

고통의 ‘환경’이 사라진 게 아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거기 널려있는 고통의 소리들. 다만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지구별 대지에 단단히 뿌리내려 현존하는 두 발의 감촉이었고, 지극히 소박한 지금 여기 맞닿는 손끝의 따스함이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이 땅에선 너무도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그녀는 진도 팽목항 천막법당에서 자식의 시신이라도 어서 나오길 바라며 어설픈 108배를 올리는 아버지 곁에 서서 “관세음보살”을 간절하게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지금, 이 분들에게 꼭 필요한 관세음은 무엇일까?’라는 조금은 근원적인 물음에 봉착했다.

출가 전 일기장의 그 구절과 쏙 닮아있는, 그것은 새로운 스펙트럼의 화두(話頭)였다. 파도치는 천막법당에 앉아 사유했다. 출가 후 다시 채워진 황금수갑의 속박이 풀려나가고, 전법(傳法)의 방편이 달라졌다. 해제하고 은사 스님 계시는 절에 일을 돕고 있는데, 가까이 진주교대에서 사라졌던 불교학생회를 재건한 눈빛 맑은 학생들이 어디선가 추천을 받고 찾아왔다.

“스님! 면면히 이어지던 불교학생회 동아리방조차 자취를 감추고 있는 안타까운 시점입니다. 지도법사를 맡아 주세요!” 학생들은 길을 묻고 있는데, 그 길을 열어주는 스님들은 없는 현실. 마치 ‘우주법계의 기획’에 가담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시작된 청년 대학생 전도(傳道)선언! 진주교대 불교학생회 선각회와 4년 여, 그리고 2019년부터 서울대학교 총불교학생회 총불이(법우들을 부르는 애칭)들과 함께 한 발 한 발 걸어 여기에 이르고 있다. 

믿는 구석이라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방황의 시간들과, 밑바닥을 겨우 짚고 일어 선 경험과, ‘당신도 나처럼,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고 평화롭고 행복하고 싶은 존재군요’라는 이 간절한 서원 하나 밖에 없으면서, 배짱도 크게 말이다.

[불교신문3551호/2020년1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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