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오신 부처님] <39> 백제는 웃고 고구려는 분노하고 가야는 굴복하다 - 부서진 동맹③
[사랑으로 오신 부처님] <39> 백제는 웃고 고구려는 분노하고 가야는 굴복하다 - 부서진 동맹③
  • 조민기
  • 승인 2020.01.1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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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를 무너뜨리려는 장수왕의 심계는 과연 …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450년 서라벌 월성

고구려의 사신이 월성에 도착하자 눌지와 신하들은 이마를 대고 엎드린 채 장수왕의 국서를 받았다. 사신은 분노하면서도 우쭐한 기분으로 큰 소리로 국서를 읽었다.

“내가 그대와 더불어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어 매우 기뻐하였는데, 이제 군사를 보내 우리 변경의 장수를 죽였으니 이는 무슨 도리인가?”

“감히 대왕의 심기를 어지럽힌 죄를 청하옵니다.”

신국의 신하들이 이마를 바닥에 댄 채 입을 모았다. 그 모습에 사신은 화를 내기가 민망해졌다. 그는 잠시 헛기침을 한 후 물었다.

“그럼 이 일을 어찌할 참인가?”

“삼직은 이미 실직의 성주가 아니라 죄인의 몸이 되었사옵니다. 만약 실직을 고구려로 압송한다면 신국의 백성들은 고구려를 두려워할 것이옵니다. 사신께서는 부디 이 점을 헤아려 주십시오.”

용서를 구하는 눌지의 태도는 진심이었다. 진심이었기에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비굴함이 없었다. 백성을 살리기 위해 무릎을 꿇은 눌지를 보며 신하들의 마음속에서는 이제껏 없던 뜨거운 감정이 자꾸만 치밀어 올랐다.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이벌찬의 아들 내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입을 다문 채 눈치를 살피던 신하들은 내숙의 말이 끝나자마자 합창하듯 한 목소리로 외쳤다.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고구려 사신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삼켰다. 분노하며 실직을 당장 데려오라던 장수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구려에서 출발할 때는 분명 그 역시 분기탱천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막상 죄를 청하는 눌지와 신국의 귀족들을 보니 당황스러웠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침묵이 흘렀다. 눌지와 신하들은 여전히 머리를 이마에 댄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신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어 말했다.

“일어나십시오. 예가 과하여 차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눌지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대왕의 국서를 가져오신 분께 어찌 소홀할 수 있겠습니까? 신국의 잘못이 있으니 어찌 몸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그만 자리에 앉으십시오. 저를 더 민망하게 하시면 신국에 머물 수 없습니다.”

눌지는 두 번을 더 거절한 후에야 자리에 앉았다. 신하들을 물린 뒤 사신과 단둘이 대전에 앉은 눌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직에서 세상을 떠난 병사의 장례는 아도스님께서 치러주셨습니다.”

눌지의 말에 고구려 사신의 눈이 커졌다. 대전 뒤에 앉아 있던 아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신은 자세를 고치며 얼른 합장하고 예배를 올렸다. 아도는 미소를 머금은 채 사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눌지는 한숨을 삼켰다. 식은땀이 흘러나온 등은 축축했고, 무릎에 저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래도 자존심을 버린 대가로 얻은 것은 컸다. 지극한 정성이 사신의 마음을 움직여 삼직을 고구려에 보내지 않게 되었고, 신하들의 충성과 백성들의 신망까지 얻었다. 그리고 눌지는 굽혀야 할 때 굽히는 것이 패배가 아니라 용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 군사를 몰고 내려가 
백제를 치고, 삼직의 목을 
가져오고 싶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장수왕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며 때를 기다렸다 

한편, 간자로 간 고구려 승려 
도림으로 인해 바둑의 재미에 
푹 빠진 개로왕과 백제 귀족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백성들은 출세를 위해 
흑돌과 백돌을 바치는데 …


아도와 도림 

대전에서 나와 사신의 거처로 간 아도는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고구려에서 지낼 적에 몇 번 본 적이 있던 도림스님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바둑의 고수였던 도림은 아도가 고구려에서 머물 때도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일까. 도림은 반가운 얼굴로 아도를 향해 합장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 계셨군요. 오랜 세월 홀로 사찰 하나 없는 타국에서 지내시면서 힘들지는 않으셨습니까?”

“좋은 시주를 만나 힘들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조금씩 이 땅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저야 처음부터 신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펼치고자 했으니 고생이랄 것도 없습니다만 스님께서는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이곳 사람들은 삭발한 머리며 검은 승복을 낯설게 생각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잔잔하게 미소를 짓던 도림이 순간 목소리를 낮추며 아도에게 속삭였다.

“저는 백제로 갈 것입니다. 고구려 병사가 죽기 전, 백제의 왕이 신국에 두 번이나 선물을 보냈다는 소식이 있어 잠시 신국에 들려본 것입니다. 지금쯤 백제의 왕은 웃고 있을 것입니다. 신국과 관계가 돈독해졌을 테니까요. 백제와 신국이 동맹을 맺으면 고구려를 견제하는 것은 수월할 테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도는 안타까운 마음에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구려와 백제는 본디 한 뿌리이건만, 고구려도 백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건만 두 나라의 원한은 점점 깊어지는군요.”

“언젠가는 이 원한도 끝이 나지 않겠습니까.”

“부디 두 나라의 해묵은 원한이 모두 풀어져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이 땅이 불국정토가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런 날을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도림은 아도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다. 그 후에도 아도와 도림은 차를 마시며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아도는 도림과 나눈 대화를 곱씹으며 처소로 돌아갔다. 그때였다. 천경림을 지나던 아도가 홀린 듯이 걸음을 멈췄다. 

“이곳이다. 이곳에 사찰을 세워야 한다.” 벅찬 눈으로 천경림을 바라보던 아도는 나무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잠시 삼매에 빠졌다. 삼매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웠다. 몸을 일으킨 아도는 천경림을 돌며 작은 소리로 염불을 했다. 

언젠가 이곳에 사찰이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을 염불에 담아 씨앗처럼 심었다. 모례 장자의 집으로 돌아가며 아도는 수십 년 동안 품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이 끝나기 위해서는 신국의 힘이 더욱 커져야 했다. 두 나라가 사라지고 신국만이 남아야 온전한 화합을 이룰 수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신국에 오게 된 것도 언젠가 신국이 고구려와 백제를 품에 안을 그 날을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살아서 그 날을 보기는 어렵겠으나 그날이 온다면, 칡넝쿨 우거진 동굴에 살아도 세상을 다 가진 것이나 진배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서진 동맹과 눌지의 죽음

한편 사신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장수왕은 분노했다. 예상은 했으나 신국을 부추겨 동맹을 맺은 백제를 향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진심을 다해 사죄하면서도 감히 고구려 병사를 살해한 죄인 삼직을 끝내 보내지 않은 신국의 유연하고도 단호한 대처 또한 생각지 못한 경우였다. 당장이라도 군사를 몰고 내려가 백제를 치고 삼직의 목을 가져오고 싶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장수왕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며 때를 기다렸다.

4년 후, 장수왕의 명을 받은 소수 정예의 고구려 군사들이 하슬라를 공격했다. 목표는 영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삼직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슬라를 공격한 고구려 군사들은 삼직을 끝내 찾지 못했고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도로 어색해졌다. 동맹국을 공격한 것은 동맹을 깨뜨리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왜군으로부터 신국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서라벌에 주둔하던 고구려 군사들은 고구려로 돌아갔다. 이후 고구려와 신국의 동맹은 깨졌고 신국은 망설임 없이 백제와 손을 잡았다. 하슬라를 방어하긴 했으나 고구려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장수왕의 성정을 아는 복호 역시 백제와 손을 잡는 것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하슬라를 공격한 이듬해, 숨을 고른 고구려는 곧바로 백제를 공격했다. 벼르고 벼른 공격이었다. 백제의 개로왕은 즉위하자마자 고구려의 대군을 맞아 전쟁을 치르며 신라에 도움을 청했다. 고구려와 백제, 신국 사이의 긴장이 팽팽해진 가운데 신국에는 지진이 크게 일어나 금성 남문이 무너져 내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눌지가 세상을 떠났다. 눌지의 뒤를 이어 마립간에 오른 이는 눌지의 장자인 자비였다. 내물왕의 세 아들 중 홀로 남은 복호가 눌지의 장례와 자비의 즉위를 주관했다. 자비는 복호에게 ‘파호갈문왕’의 지위를 내리고 복호와 보미의 딸 보혜를 왕비로 맞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재미있는 소문이 서라벌까지 들려왔다. 고구려의 승려 한 명이 장수왕의 미움을 받은 끝에 백제로 도망을 쳤는데, 그를 백제의 개로왕이 받아주었다는 것이었다. 개로가 구원한 승려에게는 아주 걸출한 재주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둑 솜씨였다. 승려로 인해 바둑의 재미에 푹 빠진 개로왕과 백제의 귀족들은 바둑돌만 잡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고 했고, 백성들은 흑돌과 백돌을 바쳐 출세한다고 했다. 모례 장자의 집이 있는 일선에서 소문을 들은 아도는 그 승려가 도림이라는 것을 알고 쓰게 웃었다. 도림을 간자로 보내 백제를 무너뜨리려는 장수왕의 심계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불교신문3550호/2020년1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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