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 서라벌은 신라의 슈라바스티
도심사찰은 걸식 유리 포교 효율적
인도와 신라는 도심에 사찰 존재해

반면 오늘날 한국 도심사찰 드물어
갈수록 젊은이들 도시로 몰려드는데
세간과 유리된 불교는 생명력 잃어

윤성식
윤성식

신라는 동방의 불국정토, 동방의 불교국가를 꿈꾸었다. 수도인 서라벌은 경전에 나오는 대도시 슈라바스티를 음사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정설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대도시였고 천년 간 수도였던 서라벌은 신라의 슈라바스티라 불릴 만하다.

슈라바스티는 부처님이 열성적으로 불교를 전파하신 대도시 중 한 곳이었으며 부처님은 당연히 슈라바스티에서 걸식하셨다. 불교는 걸식을 승가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아 도시에 사찰이 건축될 수밖에 없었다.

도심 사찰은 단지 걸식에만 유리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면 포교활동이 효율적이고 출가자도 그만큼 많아진다. 도시에 살던 부자가 불교로 개종하고 보시를 통해 불교교단은 성장했다. 기존 종교는 상상할 수도 없는 혁명적 인간관과 세계관은 주로 평민 출신이었던 부자에게 커다란 호소력을 가졌고 불교는 부자가 환호하는 종교로 성장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대부분 사찰은 산중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승려의 4대문 출입이 금지될 정도의 핍박을 받았으니 더욱 더 사찰이 산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한반도 명산은 대부분 불교 사찰 재산이고 국립공원은 사찰 토지 위에 있으니 좋은 점도 많다. 다만 아무리 교통이 발달한 요즘이라 하더라도 도심과 멀리 있는 사찰은 접근성에 있어서는 다른 종교에 비해 불리하다.

오래전에 만난 건설회사 사장이 일본 젊은이의 도심회귀 현상을 이야기했다. 도쿄에서 고속철도로 연결되는 주변 위성도시가 젊은이의 외면을 받아 점점 쇠퇴하고 일부 도시는 공동화 현상까지 발생한다는 당시 일본의 경향을 듣고 한국도 그렇게 되겠구나 생각했다. 역시 요즘 우리나라도 젊은이는 도심으로 회귀한다.

아무리 교통이 발달해도 젊은이는 도심으로만 모여든다. 도심은 사람을 끄는 여러가지 매력이 있다. 최근 사찰이 도심에도 생겨나고 있지만 아직 숫자는 많지 않다. 상가 건물을 임대하여 사찰로 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한옥 형식을 가미하거나 한옥으로 짓다 보니 건축비가 몇배나 비싸다. 주지 스님의 가장 큰 일은 대형 불사를 일으키는 일이 아닐까?

산중에 있는 사찰이 한옥이다 보니 잘못하면 도심에 있는 사찰도 한옥이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 빠져들기 쉽다. 불교가 몇 천년 전에 한반도에 들어오지 않고 20세기에 들어왔다면 사찰은 현대식 건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니 구태여 한옥을 불교의 정체성이라고 고집할 필요는 없다. 요즘 도심에는 임대가 안돼 비어 있는 사무실이 많다. 비싼 한옥을 고집할 필요도 없고 구태여 토지와 건물을 소유할 필요도 없다. 공실 사무실에 사찰을 세우면 어떨까?

서라벌과 서라벌 주변에는 수많은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그에 비하여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대도시에서 사찰 찾기가 매우 힘들다. 길 건너 기독교인과 갈등을 겪어가며 포교를 하는 스님은 어쩌면 21세기 시장자본주의를 힘겹게 살아가는 중생에게 불교를 더 잘 전파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산 속에서 세간과 유리된 불교가 아니라 중생과 부대끼며 살아야 세간을 비추는 불교의 지혜가 전파될 수 있다.

도심의 비어 있는 사무실 곳곳을 빌려 촘촘한 사찰 네트워크를 구성한다면 슈바라스티와 서라벌처럼 중생과 불교가 한데 어울리는 연기적 공간이 만들어진다. 사찰은 독자적 실체가 없으니 중생이 곧 사찰이요 중생 또한 독자적 실체가 없으니 사찰이 곧 중생이다. 사찰이 불자를 떠나 있거나 불자가 사찰을 떠나 있으면 불교가 아니다. 도시의 곳곳에서 중생과 사찰이 서로 연기화합하면 인드라망 네트워크가 바로 불교다.

[불교신문3549호/2020년1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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