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인스님

출가 전 세속에서 27년쯤 살았으니 일수(日數)로 따지면 만일 정도 되는 것 같다. 구족계를 받고는 곧장 산사로 올라와 천일기도를 하고 있으니 비구로서는 천날을 사는 셈이다. 만날 천날을 살다 보니 맨날천날 허송세월 보내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싶다.

만날 천날이 지나도 맨날 첫날인 것처럼 살고 싶다. 기도하는 천일 동안이 맨날 첫날 같았으면 좋겠다. 기도가 끝나도 맨날천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 환갑쯤이 되어 내 삶을 돌이켜 볼 때 “아, 세속에서 보낸 만날이 있었기에, 산사에서 머리 깎고 기도하는 천날도 있었던 거지. 열심히 기도한 천날이 있었기에 또 새로운 만날이 있을 수 있었던 거지” 하고 뿌듯해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가 다시 만날 첫날이 더 기쁘고 행복하지 않을까. 앞으로의 만날 천날도 더 의미있지 않을까. 새로 담근 김치가 하도 맛나서 점심 공양을 좀 많이 했더니, 노곤함에 잠깐 눈을 붙였다가 문득 눈이 떠지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이 글의 ‘맨날천날’이라는 제목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법정스님은 산속 암자에 혼자 계시면서도 제자들에게 몸무게가 몇이냐고 물으셨다지. 출가했을 때 몸무게보다 더 늘어나서는 안 된다고. 시줏물을 많이 축내면 안 된다고. 나는 시주물 축내면서 밥도 많이 먹고 달콤한 낮잠까지 잤으니, 스님이 보셨으면 불호령을 내리셨으려나.

40년이 넘도록 회자되는 <무소유(1967년 作)>라는 제목도 한때 난초에 얽매여있던 당신의 어리석음을 통해 나온 제목이니, 나도 스님처럼 어리석게 시줏물에 얽매여있다 보니 제목이 떠올랐더라고 변명해볼까.

따지고 보면 무소유도, 맨날 첫날처럼 산다는 것도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은 먹어야 살고 입어야 산다. 어제가 있어야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기에 내일도 있다. 아무것도 먹지도 입지도 않는 진짜 무소유라면 벌써 죽어버렸겠지. 진짜 맨날 첫날이라면 맨날천날 한 살 어린아이에 불과하겠지. 진짜로 죽어버리기를 원하고 언제나 한 살배기 신생아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다만 우리가 너무 가졌다는 것이 때로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짐이 되기도 하고, 다만 우리가 철이 들었다는 것이 때로는 순수했던 마음을 잊고 어른인 척 연기해야 하는 상황을 익숙하게 할 뿐. 그 익숙함에서, 그 거추장스러움에서 언젠가는 벗어나고 싶은, 어쩌면 그 마음이 오랫동안 묵어서 노인(老人)을 다시 아이처럼 만드는 게 아닐까.

천일기도를 시작할 때는 맨날 첫날처럼 항상 신심 넘치고 열심이기를 바랐다. 기왕이면 내가 바라는 기도를 일찍 성취해서 남은 나날들은 여유 있게 보낼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느덧 600일을 넘긴 오늘, 지나온 어제들을 돌아보면 바람대로 되지 않았던 날이 더 많았다. 누구도 시줏물 축낸다며 불호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책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맨날천날 맨날 첫날처럼 살고 싶어서.

그런데 이제는 맨날이 첫날만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씩 인정이 된다. 맨날 첫날 같기를 바랄 수만은 없다는 것이, 실망과 좌절은 꼭 내가 무언가를 바랐던 그만큼씩 돌아온다는 것이 인정이 된다. 그 실망과 좌절이 내게 무상함을 알려준 걸까. 맞아. 항상 성취는 결핍이 가져다주는 것을. 결핍의 무소유가 텅 빈 충만을 가져다주는 것을. 맞아. 항상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인 것을. 내가 바라던 것을 모두 이루었더라면 부처님 법도 만나지 못했을 것을.

왜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만날 천날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인가보다. 그러니 난 오늘도 준비해야지. 언제 올지 모를 다시 만날 첫날을 위해.

※ 필자 혜인스님은 가섭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2014년 사미계를 수지하고, 2018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한 후 2018년 5월13일부터 북한산 중흥사에서 1000일 기도를 시작해, 어느새 600일을 훌쩍 넘겼다.

[불교신문3549호/2020년1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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