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을수록 생각을 비워라?”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고구려 병사의 죽음 

하슬라 성주 삼직은 눌지의 분노한 시선을 그대로 받았다. 그의 얼굴은 불안한 기색 없이 담담했다. 

“그대가 고구려 장수를 습격하여 죽였는가?”

“그렇사옵니다.”

“고구려와 신국이 동맹 관계임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어찌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

“고구려 군사들이 하슬라에서 마음대로 활개를 치고 다닌 지 수십 년입니다. 파종하는 봄이건, 일손이 부족한 여름이건, 추수가 한창인 가을이건, 추위에 떠는 겨울이건 고구려 군사들은 무기를 들고 말을 타며 사냥을 합니다. 그때마다 백성들은 두려워하고 논과 밭이 엉망이 되어도 하소연하지 못합니다. 사냥을 마친 고구려 군사들의 시중도 들어야 합니다.”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것 같던 눌지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신국에 머무는 고구려 군사들은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된 군인이었다. 기약 없는 타향살이는 외롭고 힘들었다. 혈기왕성한 군사들은 전투가 없을 때면 무료했다. 특히 대륙을 누비던 기병들이 느끼는 갑갑함은 더했다. 고구려 군사들에게 사냥은 전투 훈련의 일환이었으나 신국의 백성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고구려는 신국을 구해준 나라다. 그 군사들 또한 신국을 보호하기 위해 머무는 것이다.”

“신국을 구해주었다 하여 신국의 백성을 핍박해도 된다는 말씀이옵니까?”

눌지는 억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삼직의 눈을 노려보았다. 

“그리 말하지 않았다.”

대전에는 침묵이 흘렀다.

“하슬라의 백성들이 고구려 군사들의 사냥으로 인해 고달픔이 있다는 것을 내 모르지 않는다. 허나 그렇다 하여 그대가 고구려 군사를 죽인 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

“곡식이 여물고 있는 실직 벌판에서 웃으며 사냥을 즐기는 고구려 군사를 쫓아갔을 때, 신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나이다. 신의 죽음으로 신국과 백성들이 평안할 수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삼직의 맑은 눈에는 거짓이 없었다. 눌지는 한숨을 삼켰다. 이미 고구려 군사가 하슬라 성주의 손에 살해되었다는 소식은 거련왕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고구려의 임금이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웠다.

“곧 고구려에서 사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물러가 있으라.”

눌지가 삼직을 처형하지 않자 대신들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고구려의 사신이 서라벌에 오기 전, 삼직을 처벌해야 왕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눌지는 삼직을 다시 옥으로 돌려보냈을 뿐 어떤 처벌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날 밤, 눌지와 신하들 그리고 삼직 모두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도의 입궁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한 눌지의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졌다. 눈 밑이 거무스름한 것이 건드리면 곧 폭발하거나 쓰러질 것 같기도 했다. 잠자코 지켜보던 복호가 눌지가 혼자 있는 시간을 기다려 다가가 입을 열었다.

“형님”

모처럼 형제간의 대화였으나 눌지는 동생의 얼굴을 볼 여유도 없었다. 

“요 며칠 마음이 많이 복잡하시지요?”

“실직의 말 중에 틀린 것이 없다. 그는 하슬라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고구려 군사를 죽였다. 일개 성주가 그러할진대 제 나라 백성 하나 지키지 못하는 내가 마립간이라 할 수 있겠느냐?”

“실직의 용기가 가상하긴 하나 하슬라 백성이 아니라 신국 전체를 생각했다면 더 신중했을 것입니다. 실직이 일개 성주일 뿐 마립간이 아닌 것처럼 마립간께서도 성주가 아니십니다. 고민의 무게도, 할 수 있는 행동도 다른 것이 당연합니다.”

복호의 말에 눌지의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하냐?”

“그러하옵니다. 고구려는 신국의 동맹국이 아니옵니까? 당초 실성을 고구려에 질자로 보내 동맹을 청한 것도 신국이었습니다. 고구려가 동맹인 덕분에 신국이 받은 도움이 큽니다. 마립간께서는 이를 헤아리신 것이지요.”

“맞다. 허나 고구려 군사가 신국 곳곳을 마음대로 누비며 사냥을 하는 것조차 막을 수 없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니냐.”

“그렇지 않사옵니다.”

“이틀 후면 고구려 사신이 당도할 것이다. 아마 백제와 친분을 나누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을 것이다. 고구려는 백제를 원수 보듯 하는데 고구려 사신이 무슨 말을 할지 걱정이로구나.”

“형님, 생각이 많을 때 계속 생각을 하면 걱정만 늘게 되옵니다. 생각이 많을수록 생각을 비워내야 답을 찾기가 수월합니다.”

“생각이 많을수록 생각을 비워라?”

“예”

“누가 그런 말을 하더냐?”

“고구려에서 만난 신의 스승이자 벗인 아도스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아! 네가 신국으로 돌아올 때 고구려 스님 한 분이 함께 왔다고 했지? 그분은 지금 어디 계시냐? 고구려인들은 불심(佛心)이 깊다고 들었다. 스님께 조언을 들을 수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형님께서 찾으실 줄 알고 제가 미리 서라벌에 모셔왔습니다. 하명만 하시면 바로 입궁할 수 있사옵니다.”

“오호, 다행이로구나. 날이 어두워지거든 스님의 입궁을 돕거라. 스님을 뵙고 가르침을 청해야겠다.”

“그리하시지요. 분명 좋은 답을 찾으실 것입니다.”
 

“형님, 생각이 많을 때
계속 생각을 하면
걱정만 늘게 되옵니다
생각이 많을수록
생각을 비워내야
답을 찾기가 수월합니다”

“고구려에서 만난
신의 스승이자 벗인
아도스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복호의 말을 듣고 
궁으로 초청한 아도스님이
해 준 답변은 의외였다

“고구려의 분노를
피할 길은 없습니다”


고구려에서 온 사신 

늦은 밤, 아도를 태운 가마가 월성으로 향했다. 복호의 부탁을 받고 서라벌에 온 아도는 고구려 군사들이 머무는 마을이 아닌 옛 실성의 집에서 지냈다. 혹시라도 아는 얼굴을 만날까 외출은 아예 하지 않았다. 복호는 아도가 서라벌에 왔다는 것을 아내 보미에게도 숨겼다. 고구려와의 관계가 예민해져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복호는 왕비 아로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로 부인은 두말없이 복호를 도왔다. 그녀는 옛 친정집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궁을 나와 아도를 만났다. 아로 부인은 아도의 맑은 얼굴을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저분이라면 마립간의 고민을 덜어주실 것이다.’

복호에게 아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믿음은 더욱 커졌다. 그 후 아로 부인은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를 시켜 음식 등을 아도에게 가져다주었다. 때로는 직접 가져가기도 했다. 며칠 사이 아로 부인의 가마가 옛 친정을 드나드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늘어났다. 눌지가 아도의 입궁을 허락하자, 아로 부인과 복호는 머리를 짜낸 끝에 아도를 아로 부인의 가마에 태우기로 했다. 왕비의 가마를 타고 입궁한다면 만에 하나 발각된다 해도 눈속임을 할 수 있었다. 아도는 아로 부인의 가마를 타고 입궁했고, 눌지와 아로 부인은 내전에서 그를 맞았다.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스님께서는 무슨 좋은 묘안이라도 있으신지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눌지의 이야기를 듣던 아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고구려의 분노를 피할 길은 없습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순간 울컥 화가 치민 눌지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럼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커다란 분노를 만났을 때는 그 분노를 맞는 것도 화를 피하는 방법입니다.”

“네?”

눌지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도를 바라보았다. 

“상대방이 퍼붓는 분노를 아프지 않게 맞으면 됩니다. 고구려가 공격해도 반격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만약 마립간께서 고구려 사신 앞에서 뻣뻣한 태도를 보인다면, 고구려와 동맹이 아닌 적이 될 것입니다. 이는 마립간께서도 원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신국이 잘못을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분노하는 모습을 계속 보이긴 어려울 것입니다. 신국이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했는데도 고구려가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그때 동맹을 파해도 늦지 않습니다.”

[불교신문3548호/2020년1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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