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팔공총림 동화사에서 진제 종정예하로부터 대종사 법계를 품서받은 12명 비구 스님들은 모두 탁월한 수행자이자 지도자로 정평이 나 있다. 전국 제방선원에서 수선안거하며 수행력을 쌓은 것은 물론 출가 후 50여 년 가까이 중앙종무기관과 본말사에서 크고 작은 소임을 맡으며 명실상부 어른 스님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지역 포교 일선에 뛰어들어 중생을 교화하고 지혜와 자비의 부처님법을 전하는 데도 공헌한 바가 크다. 대종사 법계에 품서된 스님들의 수행이력을 소개한다.

법인스님은 만공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내전(불교경전)과 외전(사회학문)을 겸비한 교육이 승가에 필요하다는 원력을 세우고 해인사 강원에서 수학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했다. 일본에서 수학하던 중에도 1975년 동경 명월사를 창건, 사찰에 주석하면서 20만명에 이르는 재일동포들을 교화해냈다. 지금의 천안 각원사에 있는 청동 남북통일기원 대불 또한 법인스님과 재일동포 각연 김영조 거사가 이 때의 인연으로 1977년 봉안해 지금에 이른 것이다. 법인스님은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100만인 불사 등 전법포교에 진력하며 천안 각원사를 연간 40만 명이 다녀가는 사찰로 일궈냈다. ‘불교입문등 스님이 쓴 논문과 저서도 20여 권에 이른다. 동국대 사학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거쳐 동국대 대학원을 마쳤으며 1987년 일본 대동문화대학에서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현재 천안 각원사 조실로 주석하며 각원불교대학 운영과 지역 독거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과 천안교도소와 개방교도소 등 재소자를 위한 법회 및 물품 지원을 해오고 있다.

보광스님은 고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해인사 강원에서 수학했다. 해인사 재무 및 규정국장, 승가대 교수, 용탑선원장 등을 역임했다. 부산에 전등사를 창건, 도심포교에 매진해왔다.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일이 가장 우선순위라는 생각 아래 전등사를 찾아오는 신도들 뿐 아니라 지역민을 위한 대중 법문에도 힘썼다. 부산대학교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대각회 이사, 해인사 승가대학 장학회 이사장, 부산서구 사암연합회장, 부산불교교육원장 등을 지낸 바 있다. 전법포교 활동에 진력한 공로로 조계종 총무원장 표창과 부산시장 사회봉사공로 표창을 받았다. 현재 고암문도회를 이끌고 있다.

문인스님은 도원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해인사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영천포교당 주지를 맡아 대중 교화에 앞장섰다. 부석사 주지로 있을 때 범종각과 유물관 등을 건립하고 봉정사 주지 소임을 맡고나서는 대웅전과 극락전 등을 보수하며 도량 정비에 큰 공을 들였다. 대구 법왕사를 창건, 지역 포교 일선에서 활동하며 전법과 포교에 매진했다. 고운사 주지, 총무원 총무부장, 8,9,10대 중앙종회의원 소임을 맡아 중앙과 지역사회의 소통에도 크게 기여했다. 종단 기반을 다지는 데 이바지한 공이 크다.

청우스님은 향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청우스님은 강릉 정동진에 위치한 등명낙가사 사격을 일신시키면서 중앙포교사로서 지역포교에도 진력해왔다. 강릉경찰서 초대 경승실장으로서 전국 최초로 경찰서 내에 법당을 개원한 뒤에도 20년 넘게 경승으로 경찰포교에 앞장섰다. 강릉교도소 교화위원으로 30년간 활동했으며 틈나는 대로 육해공군 부대 법당을 찾아가 감로법문을 통해 군장병들을 격려해왔다.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이자 신라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한 곳인 사굴산문을 개산한 범일국사의 가르침을 계승해 나가기 위해 범일국사문화축전위원장과 강릉불교사암연합회장을 맡아 강릉지역 내 불교계 위상 강화에도 헌신해 왔다. 이같은 공로로 제18회 포교대상 공로상, 24회 교정대상 자비상 등을 각각 수상하기도 했다. 조계종 소청심사위원장과 총무원 총무국장, 교무국장 등을 역임하면서 종단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자광스님은 경산스님을 계사로 득도했다.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수학했으며 동국대 종비생 1기를 대표하는 졸업생이다. 자광스님은 무엇보다 군포교와 인연이 깊다. 군승 장교로 임관해 국방부 군종실장을 역임, 3군 선봉사와 육군사관학교 호국선원 등을 창건하는 등 20여 년 동안 군포교 일선에서 활동했다. 군승법사 정원을 100여 명 가까이 늘리는데 공헌했으며 종단 대작 불사인 논산 육군훈련소 법당인 호국 연무사건립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이를 증명하듯 호국 연무사 경내에는 이를 자광스님 공덕비가 세워져있는 것 볼 수 있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제2대 군종특별교구장을 지냈으며 조계종 호계원장, 동국대 이사장 등 종단 주요 요직에서 활동했다. 현재 경기지방경찰청 경승위원, 한국대학법인협의회 이사, 반야선원 주지 등을 맡고 있다.

천진스님은 대휘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02년부터 2015년까지 영축총림에서 유나 소임을, 통도사 율학승가대학원에서 운영위원을 맡으며 평생 수좌로서의 삶을 살며 후학들을 제접하는 데 이바지해왔다. 스님의 수행관은 식념망려(息念忘慮)’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생각을 잠시 쉬고 걱정을 잊다보면 참마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통도사 수행 가풍을 확립한 구하스님, 경봉스님, 월하스님은 물론이고 성철스님, 서암스님 등 수승한 선지식을 보며 전국 선방을 찾아 마음 밭을 경작했다. 1981년부터 2019년까지 해인사, 칠불사, 상원사, 백담사 등 전국 선원에서 40여 안거를 났다. 현재 통도사 보살선원장을 맡고 있다.

 

1월8일 대구 동화서에서 거행된 대종사 법계 품서식 후 진제 종정예하와 대종사 스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1월8일 대구 동화서에서 거행된 대종사 법계 품서식 후 진제 종정예하와 대종사 스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종성스님은 지관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62년 해인사 강원에 입학하면서부터 사중 크고 작은 소임을 맡아 대중 화합에 힘썼다. 때문에 해인사의 살아있는 역사로 통한다. 원주 소임으로 시작해 해인총림 선원 도감 등을 맡으며 영암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부터 총 7명의 주지가 거쳐갈 때까지 총림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대중생활이 여법히 꾸려지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 홍제암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1977년부터 해마다 사명대사 추모재 및 자비도량참법 참회 천도법회를 봉행해오고 있다. 8,9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하며 종단의 종헌종법 기틀을 다지는 데도 앞장섰다. 현재 홍제암 감원이다.

정우스님은 태주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62년 범어사에서 수선 안거한 이래 21안거를 성만, 한국불교 전통수행법인 간화선 참구에 진력해왔다. 내전 외에도 외전의 필요성을 느껴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동국대 교육대학원에서 역사교육을 공부했다. 총무원 총무국장, 교무국장, 포교국장 등 종무행정의 다양한 실무를 맡아 종단 기틀을 다지는 데 힘을 보탰다. 11,12대 중앙종회의원으로 활동하며 1994년 종단개혁 직후 현재의 종헌종법 초석을 다지는 데 공헌했다. 구미불교사암연합회를 창립, 경북 지역 사찰 간 교류와 협력에 30여 년 가까이 공헌하며 지역 포교 일선에서 활동해왔다. 금강사 주지다.

정광스님은 대월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출가 후 40여 년을 전국 여러 선원에서 수행하며 참선 외길을 걸었다. 동화사, 해인사, 송광사 선원 등을 거쳐 봉암사에서 30년 머물렀다. 봉암사를 일방적으로 국립공원 안에 편입하려는 정부에 맞서 오늘날의 봉암사로 지켜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봉암사 태고선원 선원장을 지냈으며 저서로 <지증대사비명소고(智證大師碑銘小考, 1992년 간행)>가 있다. 정진력이 깊고 이()와 사()에 원융함을 지닌, 교학에 밝으면서도 수행에 전념해 온 대종장(大宗匠)으로 평가받는다. 현재 서운암 무위선원에서 정진중이다.

혜거스님은 탄허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월정사 강원을 마친 뒤 전국 선원에서 수행했으며 1988년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지금의 금강선원을 열어 30여 년 넘게 참선 지도와 경전 강의에 앞장섰다. 28년간 경전반을 상설 운영해 각계각층의 시민들에게 부처님법을 전했으며 전국금강경강송대회를 개최해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을 불자들에게 알리는 일에 힘썼다. 현대인들을 위한 스님의 참선 지도는 도심 포교의 새로운 개척 모델로 평가 받는다. 어린이와 청소년, 일반인들을 위한 계층별 지도로 해마다 15000여 명이 금강선원을 찾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나>, <15분 집중 공부법>, <가시가 꽃이 되다>, <명상으로 10대의 뇌를 깨워라> 등 저서를 출간했으며 마음 치유와 인성프로그램 개발, 명상 지도자 양성 등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불교적 가르침을 토대로 이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왔다. 조계종 포교연구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제30회 조계종 포교대상 대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선용스님은 도원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스님은 무엇보다 거창 지역에서 활발한 포교로 이름나 있다. 1998년 개산한 거창 아림사에 오랫동안 주석하며 지역 포교 일선에서 활동했다. ‘거창군삶의쉼터관장을 지내며 장애인과 독거노인, 여성 등 소외 계층에게 사회복지 및 재활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자비나눔의 표본을 보였다. 지역 포교에 힘쓰면서도 총무원과 해인사에서 여러 차례 소임을 살았다. 1980년대 초 시작한 총무원 소임은 교무국장, 규정국장(지금의 호법국장), 사회국장을 두루 거쳤다. 2002년 총무부장과 총무원장 권한대행을 맡았다. 11대 중앙종회의원과 초심호계위원을 역임하며 종단 기틀을 바로 세우는 데도 앞장섰다.

동광스님은 청담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스님은 청소년과 청년 등 젊은 세대를 위한 전법포교에 특히 힘썼다. 청담장학문화재단 운영을 바탕으로 청소년교화연합회 제6대 총재로 추대됐으며 등 청담학원 이사장과 혜명복지원 이사장 등을 지낸 바 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재단법인 생명나눔실천회 등에서 활동하며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을 지속적 실천으로 풀어냈다. “수행자는 항상 중생의 고통과 괴로움을 살피는 하화중생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일념 하에 재소자 교정교화에도 앞장섰다. 1970년부터 매주 안양교도소와 서울영등포구치소를 오가며 수많은 재소자들을 교화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 제33법의 날을 기념 국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동광스님 설법을 들은 재소자는 무려 104000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미아동과 상계동 일대 독거노인과 청소년들에게 매일 무료 점심공양을 하는 자비의 집을 운영하는 등 생계가 어려운 지역민들을 위한 일에도 힘썼다. 13대 중앙종회의원, 14대 중앙종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현재 청담장학문화재단 이사장, 법계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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