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4년 신년 특집’
5·18 40주년, 부처님오신날 그날


도청 앞 분수대 사이 ‘봉축탑’
시민 집회 중단 점등식 개최
제등행렬은 불상사 우려 취소
사찰, 떡 과일 시민군에 전달

‘김동수 대불련 전남지부장’은
전남도청 끝까지 지키다 '산화'
무력 진압 후 암혹한 시기에도
관음사 ‘희생자들을 위한 법회’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이 4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그해 5월 부처님오신날은 숱한 생명이 목숨을 잃은 비극이었다.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현장에 있던 불자들을 증언과 5·18 기념재단이 발간한 <불교계 5·18민주화운동 구술기록 조사·수집 연구용역 최종결과 보고서〉 등을 참고해 정리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영상에 보이는 부처님오신날 봉축탑. 출처 = 연합뉴스TV 화면.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영상에 보이는 부처님오신날 봉축탑. 출처=연합뉴스TV

1980년 5월21일은 음력 4월8일 부처님오신날이다. 불자뿐 아니라 민족 최대 명절의 하나인 이날. 전남도청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계엄군이 오전 10시경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했다. 생명의 존귀함을 널리 알린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날, 평화로워야 할 그날, 가장 잔인하고 참혹한 만행이 일어났다.

적군도 아닌 아군의 총에 꽃다운 청춘과 무고한 시민이 무참히 쓰러졌다. 도청 앞 분수대와 시계탑 사이에는 ‘봉축 부처님오신날’과 ‘불기 2424년’이란 글씨가 적힌 봉축탑(점등탑)이 그날의 아픔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봉축탑은 민주화운동 기간 총에 맞아 파괴 되고 말았다. 헝겊이 다 떨어져 나가고 플라스틱 연등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1980년 광주지역 부처님오신날봉축위원회 진행위원장을 지낸 이순규 빛가람병원 의학박사는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부처님오신날인 5월21일 오전10시는 전국 사찰에서 가장 성스러운 욕불(浴佛)의식을 하는 시간입니다. 바로 그 때 전남도청 앞에서는 군인들이 국민을 향해 총을 발사한 것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 기간에 훼손된 도청 앞 봉축탑. 출처 = 서울신문 영상.
광주민주화운동 기간에 훼손된 도청 앞 봉축탑. 출처=서울신문

그 무렵 광주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면 무등산 공군부대, 상무대 육군부대, 광주교도소를 위문하며 봉축행사를 시작했다. 도청과 분수대 사이에 점등탑을 세우고 스님과 신도들이 건립법회를 봉행했다. 부처님오신날을 일주일 가량 앞두고 점등탑을 밝히는 법회를 하는 날, 도청 앞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집회를 하고 있었다.

이순규 위원장은 김동수 진행부위원장(대불련 전남지부장)을 시위를 주도하는 전남대 학생들에게 보내 법회를 할 동안 집회를 잠시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 요청이 받아들여져 점등식은 무사히 봉행됐다. 하지만 광주의 3대 봉축행사 가운데 하나인 제등행렬은 5월 20일 저녁 도청을 출발해 금남로로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무산되고 말았다.

1980년 5월 18일, 19일 광주공원 시민회관에서 부처님오신날 기념 사상강연회(법회)가 열렸다. 18일에는 법정스님, 19일에는 이항녕 홍익대 총장이 연사로 나섰다. 두 번 다 500여 명에 이르는 시민이 강당을 채웠다. 사회는 김동수 대불련 전남지부장이 맡았다.

이튿날 광주 상황은 심각해졌다. 강연을 마친 이항녕 박사를 모시고 점심을 하기 위해 금남로 4가 영안반점을 찾았다. 오후 2시 40분 서울 가는 중앙고속버스 표를 끊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소란스러워 밖을 보니 공수부대원들이 시내 중심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위하다 달아나는 시민과 학생을 끝까지 쫒아 무차별 폭행했다.

이순규 박사는 “그 전에는 학생들이 가게 같은 곳으로 피신하면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는데, 이날은 가게 문을 부수고 들어가 시위한 사람을 잡아내 무자비하게 때리는 등 양상이 달라졌다”면서 “더 머물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아 이항녕 총장님을 모시고 고속터미널로 가서 서울 가는 버스를 타게 했다”고 회고했다.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이순규 박사는 대불련 학생들을 피신시켰다. 그런데 광주를 빠져 나간 줄 알았던 김동수 지부장이 도청으로 다시 돌아와 시민군에 가담했다. 이순규 박사는 “누구보다 신심이 깊었던 (김)동수가 도청에서 시신을 수습하고 안치하고 염불하는 한편 부상자를 치료하는 일을 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순간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한 이 시대의 진정한 보살”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불교계 상황을 설명하는 이순규 의학박사.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불교계 상황을 설명하는 이순규 의학박사.

계엄군이 도청을 무력 진압한 뒤에 이순규 박사는 김동수 지부장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6월 7일, 270구~300구 정도의 시신이 가매장 된 망월동 묘지(5·18 구묘역)에서 찾을 수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광주경찰서 추경사의 도움으로 대불련 뺏지, 단주, 수강신청서를 지니고 있던 김동수 지부장의 시신을 확인했다. 그해 광주지역의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도청 앞에 점등탑을 세우고, 거리에 연등을 달았지만, 정상적으로 봉축행사를 할 수 없었다.

1980년 5월의 충격으로 이순규 박사는 심한 외상스트레스 장애로 오랜 기간 신행활동을 중지하는 등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1992년 대불련 동문들과 함께 ‘지광 김동수 열사비’를 조선대에 건립한 뒤에야 마음을 빚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현중순 전 조선대 교수는 1980년 5월 21일 부처님오신날 광주 광륵사를 다녀왔을 때의 일이 생생하다. 현 전 교수는 “(거리에는) 왕래하는 사람 하나 없고, 삼엄한 분위기를 뚫고 이른 아침부터 걸어서 어머니와 함께 절에 갔다”면서 “법당에 들려 부처님 전에 절하고 돌아오는 길은 갈 때 마음 조이던 것보다 더 겁이 났다”고 기억했다.

모친과 함께 광륵사에 다녀오는 길에 절에서 나누어 준 절편을 시민군에게 건넸다. 피 흘리는 환자를 손수레에 싣고 광주 기독병원을 찾아가는 시민군이었다. 현중순 전 교수는 “아주머니들은 주먹밥을, 방앗간에서는 떡을 만들어 시민군 차량에 내놓았던 인심을 잊을 수 없다”고 전했다.
 

1980년 6월3일 당시 총무원장 월주스님을 비롯한 종단 대표단이 광주시를 방문해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사진은 1980년 6월15일자 불교신문 기사.
1980년 6월3일 당시 총무원장 월주스님을 비롯한 종단 대표단이 광주시를 방문해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사진은 1980년 6월15일자 불교신문 기사.

당시 광주 증심사 총무 성연스님은 5·18재단 구술에서 “금남로 사거리 시민들 사이에서 현장을 목격했다”면서 “석가탄신일 당일에는 시내가 마비 되어 증심사 쪽으로 차량통행도 안되고 초파일 행사를 근본적으로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스님은 “증심사 신도들과 과일과 음식물을 싣고 간 리어카를 (시민들이 먹을 수 있도록) MBC 삼거리에 놓았다”면서 “(계엄군의 발포 이후에는) 증심사 신도들이 시민군 부상자들이 있는 전남대병원을 찾아 헌혈을 했다”고 회고했다. 다른 사찰에서도 주먹밥이나 떡, 과일을 준비해 시민군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당시 도청 앞과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시민군이 밀고 밀리는 싸움을 하며 흩어지면 중앙교회나 원각사 쪽으로 도망쳤다. 이때 진압봉에 다친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원각사에 피신하면 신도들이 치료해 주었다. 김동채씨는 “(원각사에서) 고등학생들과 불자들이 초파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피를 흘리며 원각사 마당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신도들이 난리가 났다”면서 “그때부터 신도들이 참가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됐다”고 말했다.

정종구 전남대 교수는 그 당시 광주를 찾은 총무원 스님들에게 “광주 시내 곳곳에 희생자들의 시신이 줄지어 있었다”면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광주에서 석유 도매업을 하고 있던 최선희 조계종 전남신도회장도 “시민군들에게 수십 통의 석유를 나누어 주었는데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면서 “의롭게 죽어간 시민들의 피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무력으로 진압된 후 정국은 경색됐다. 누구 하나 ‘광주’를 입어 올리기 어려웠다. 언론에서는 연일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들이 주도한 무장폭력사태’라고 보도했다. 엄혹한 상황이었지만 당시 총무원장 월주스님을 비롯한 종단 지도부가 발 벗고 나섰다.

종단은 광주시민돕기대책본부(본부장 월주스님, 집행위원장 정대스님)를 구성해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호소문을 발표했다. 5월24일에는 ‘소요사태 진상조사 선무단’을 급파하고 신도들을 대상으로 모금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당시 월주스님은 “모든 불자들은 동체대비사상으로 한마음이 되어 광주시민을 돕자”고 호소했다. 종단에서 발행하는 <대한불교신문(지금의 불교신문)>도 광주시민 돕기 기사와 모금 운동을 안내하는 등 적극 나섰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 끝까지 남아 시신수습 등 보살행을 실천하다 산화한 김동수 대불련 전남지부장 추모비. 모교인 조선대에 세워져 있다. 사진=이준엽 광주전남지사장.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 끝까지 남아 시신수습 등 보살행을 실천하다 산화한 김동수 대불련 전남지부장 추모비. 모교인 조선대에 세워져 있다. 

이어 1980년 6월3일에는 총무원장 월주스님을 비롯한 대표단이 광주시를 직접 방문해 희생자들의 유가족과 부상자를 위로했다. 이날 오전 11시 광주시 충장로 4가 관음사에서 총무원장 월주스님, 교무부장 현광스님, 관음사 주지 상인스님, 신도 등 200여 명이 동참한 가운데 ‘희생자들을 위한 법회’가 엄숙한 분위기에서 봉행했다. 불단에는 ‘광주사태 희생자 영가’라는 위패를 안치했다.

월주스님(조계종 원로의원)은 “1980년 6월 광주에 다녀온 뒤 만난 이환의 전 MBC 사장이 ‘(MBC)직원을 광주에 보내지 말라고 한 (정보기관의) 요구를 듣지 않아 강제로 (사장직에서) 물러났다’면서 ‘그런데 광주에 다녀오신 스님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계시네요’라는 말을 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스님은 그해 신군부가 자행한 10·27법난으로 총무원장에서 강제로 물러나야 했다. 광주 시민돕기 모금운동 등을 보도한 <대한불교신문>도 강제 폐간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광주=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이준엽 광주·전남지사장 maha0703@ibulgyo.com

[불교신문3547호/2020년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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