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4년 신년 특집’ 화엄사 행자의 하루

손바닥 만한 스마트폰 하나면 원하는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세상이 됐다. 부러 도서관을 찾아 산더미 같은 책을 뒤적이며 답을 찾아내고 여행 지도를 짊어지고 다니며 곳곳을 떠돌던 청춘의 모습은 이제 없다. 24시간 클릭 한번으로 정보를, 물건을, 사람을 손쉽게 구하는 세상, 어느 누가 절간에 들어오려 할까 싶지만 세상이 주는 편리를 포기하고 출가의 길을 택하는 이들이 있다. 수행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 스님의 권유,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서, 인생을 뒤흔든 충격으로, 저마다 계기는 다르지만 삭발염의하고 행자복을 입는 순간 끝없는 인고의 시간과 맞닥뜨려야 하는 건 매한가지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자고 싶은 것, 뭐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이 꾹꾹 누르듯 듯 사는 삶, 요즘 세대가 마주한 행자 생활은 어떨까. 조계종 제19교구본사 화엄사에서 출가한 정 행자(32)의 하루를 지난 1212일부터 13일까지 따라가봤다.

사방이 적요로 가득한 오전5시 정 행자가 아침공양 준비를 위해 빈 그릇을 나르고 있다.
사방이 적요로 가득한 오전5시 정 행자가 아침공양 준비를 위해 빈 그릇을 나르고 있다.

몸에 스며든 산사의 새벽

오전2시10분. 사방이 적요로 가득한 시간, 정 행자가 어둠 속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있으면 추워지니 서둘러야 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종종 걸음으로 대웅전을 향했다. 문을 열고 전깃불부터 켰다. 불단과 신중단 마다 놓인 초에 불을 붙이고 향을 살랐다. 청수를 따르고 나서는 어간 빗장마다 걸린 잠금쇠를 풀었다. 각황전으로 이동하기 전 잊은 건 없는 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렀다.

나한전, 원통전, 영전, 명부전 등 경내 모든 전각 문을 열고 기도 준비를 하는 게 정 행자의 첫 일과였다. 그제야 끝났나 싶지만 발길은 공양간으로 향했다. 오전2시45분. 어른 스님들 앉는 자리마다 테이블을 닦고 수저와 젓가락을 놓았다. “오해 마세요, 이리 해야 제 마음이 편해서 그러는 거니. 절마다 다르겠지만 행자들은 보통 오전3시30분쯤 일어납니다.”

스스로 시간에 쫓기는 것이 싫어 오전2시 일어나는 길을 택했다는 정 행자는 베테랑 행자다. 3년 전 한 사찰에서 출가했다 중도포기하고 한달 만에 집으로 돌아 왔다는 그는 오랜 고민 끝 지난 8월20일 다시 화엄사로 출가했다.

행자 생활을 한 지 100일 가까이 흘렀다는 그에겐 이미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잠에 드는 생활이 몸에 스민 듯 보였다. 코끝 찡한 추위가 밀려오는 겨울, 매일같이 따뜻한 이불 속을 박차고 일어나는 일이 버거운 적 없냐고 묻자 정 행자는 “하다보면 익숙해진다”고 짧게 말했다.

1분도 허투루 쓰임이 없다

오전4시17분. 칼바람이 몰아치는 새벽 시간에도 행자의 하루는 흐른다. 완전 무장이라고 해봤자 단출한 행자복 하나. 쪽잠을 자고 용케 일어난 정 행자가 겹겹이 내의를 껴입고 종각으로 향했다. 도량석이 시작되고 운고루에 불이 켜지면 그에 맞춰 종각 불을 밝히고 종을 치는 것도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학인 스님들이 법고를 울리는 동안 매서운 바람이 정 행자를 스쳤다. 모두 4번, 새벽 예불, 정오 12시, 저녁 예불, 모두가 잠드는 오후9시. 산사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일이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

10분 동안 종을 치고 난 정 행자가 새벽 예불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잰걸음을 쳤다. 예불이 시작된 각황전에 들어 서기 앞서 선배 스님들 신발부터 가지런히 놓았다. 칠정례를 외고 있는 스님들 사이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로 반야심경을 욌다.

수저 놓는 것 하나 흐트러짐 없이

어느 절이나 행자의 주업무는 공양 준비다. 오전5시10분, 예불이 끝나자마자 정 행자가 부리나케 공양간으로 향했다. 조급한 마음을 부여잡고 공양간 안에 마련된 조앙단에 예불부터 올렸다. 물 한잔 마실 새 없이 스님들 자리를 닦았다. 62명 수저와 젓가락을 정성스레 놓았다. 테이블 마다 놓인 김통과 간장그릇을 빈 데 없이 채웠다.

따뜻한 보리차를 가득 채운 주전자를 제 위치에 비치하고 나면 배식 준비가 기다렸다. 반찬마다 먹기 편하게 집기를 놓고 국그릇, 접시도 일렬로 정렬, 스님들이 공양간에 들어오기 전까지 ‘각 잡기’는 계속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절로 매순간 긴장하게 된다”고 정 행자는 말했다. 오전5시45분. 모든 스님 그릇이 채워지고 나서야 정 행자가 이른 노동으로 달디 단 밥맛을 봤다.

손이 귀한 집 외동아들로 자란 정 행자는 출가 전 부엌일이라곤 해 본 적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평불만이 없었다. “공양간 일을 하다보면 대중 생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눈에 들어와요. 사중 스님들이 몇 분 계시는 지, 공양하러 오지 않는 분이 계시면 절에 무슨 일이 있는지 대략 알 수 있거든요. 대중생활의 기본을 익히는 과정인거죠.”
 

① 하루 세 번 공양준비를 돕는 것이 행자의 주 업무다 ②수저 하나 놓는 일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③강주 혜수스님으로부터 '사미율의' 수업을 듣는 정 행자. ④ 도량석이 시작되고 운고루에 불이 켜지면 그에 맞춰 종각 불을 밝히고 종을 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⑤사시마지를 올린 뒤 부처님께 3배의 예를 올리고 있다.
하루 세 번 공양준비를 돕는 것이 행자의 주 업무다 
① 하루 세 번 공양준비를 돕는 것이 행자의 주 업무다 ②수저 하나 놓는 일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③강주 혜수스님으로부터 '사미율의' 수업을 듣는 정 행자. ④ 도량석이 시작되고 운고루에 불이 켜지면 그에 맞춰 종각 불을 밝히고 종을 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⑤사시마지를 올린 뒤 부처님께 3배의 예를 올리고 있다.
행자들은 수저 하나 놓는 일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① 하루 세 번 공양준비를 돕는 것이 행자의 주 업무다 ②수저 하나 놓는 일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 ③강주 혜수스님으로부터 '사미율의' 수업을 듣는 정 행자. ④ 도량석이 시작되고 운고루에 불이 켜지면 그에 맞춰 종각 불을 밝히고 종을 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⑤사시마지를 올린 뒤 부처님께 3배의 예를 올리고 있다.
 도량석이 시작되고 운고루에 불이 켜지면 그에 맞춰 종각 불을 밝히고 종을 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법고가 끝나길 기다리는 정 행자.

‘똥군기’ 옛말…합리적으로 배운다

오전6시48분. 정 행자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겨 후원으로 향했다. 운력을 하는 선배 스님들 청소도구를 먼저 챙긴 뒤 행자 담당 구역인 공양간과 화장실 주변 정리에 나섰다. 매일 쓸고 닦는 덕분에 새로 치울 것 없이 깨끗했지만 청소는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 그가 묵고 있는 청풍당 마룻바닥, 종을 치기 위해 하루4번 들리는 종각도 먼저 하나 없이 깨끗이 쓸고 닦았다.

틈날 때마다 교육을 받는 정 행자는 이날도 오전8시 강주 혜수스님에게 <사미율의>를 배웠다. 선배 스님과 눈도 못 마주치던 때는 옛 말, 사미십계 중 ‘거짓말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두고 자유로운 질문이 오갔다. “스님 이해가 잘 안됩니다. 본 것을 못 보았다 하고 못 본 것을 보았다 하는 게 그렇게 나쁜 죄에 해당하는 지요.”

혜수스님은 선한 거짓말이 쓰이는 일상속 사례를 들며 근기에 맞춰 일렀다. 갸우뚱하는 정 행자의 표정을 읽고는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질문해도 좋다고 했다.

마지 올릴 준비를 해야 하는 사시가 다가오자 정 행자가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손목시계를 봤다. 계획대로 움직여야만 하는 정 행자 성격은 사중 스님들 눈에도 띈 듯 했다. 혜수스님은 어진 말로 일렀다. “마음을 급하게 먹으면 공부가 되지 않는다. 수행자는 마음공부가 우선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정 행자는 스스로 본인이 정한 틀에 갇히는 경향이 강하니 늘 경계하라. 책에서 보는 것이 다가 아니라 일상이 수행이고 공부다.” 강주 스님 질책을 받은 정 행자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스쳤다.

그럼에도 긴장의 연속

오전9시12분. 사시 마지를 위해 정 행자가 공양간으로 향했다. 전각마다 올릴 10개 그릇에 밥을 담고 물을 묻혀 모양을 다듬었다. 마지 그릇을 두 손 높이 받들고 전각으로 향했다. 부처님께 3배의 예를 갖춘 뒤 공양간으로 돌아와 조앙신께 빠짐없이 사시예불을 올렸다.

점심 공양까진 틈을 내 쉬었다. 고구마, 치즈케익 등 대중공양으로 들어온 간식 먹는 소소한 재미도 이 때 있었다. 여유 시간을 갖는 동안 공양간 출입구 유리문을 닦아달라는 공양주 부탁도 들어줬다. 요청한 한 쪽 문 외에 반대쪽 문도 스스로 닦았다. 유리문에 붙여진 낡은 포스터가 거슬렸지만 정 행자는 종이 하나 섣불리 떼지 않았다.

행자가 하는 모든 일엔 흐트러짐이 없었다. 더하거나 빼는 일 없이 본래 제 위치에 놓였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입산할 때 호되게 혼난 탓이겠거니 했지만 정 행자는 말했다.

“옛날 행자 시절 때는 이유 없이 혼나기도 했다고 하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출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인터넷 검색인데요 뭐. 행자 생활을 하다 도중에 그만두는 이유 태반이 지레짐작으로 막연히 출가한 경운데, 각오를 하고 들어와 어느 정도 버티다 보면 시중 일이 문득 이해가 되는 순간이 와요. 자유롭고 합리적인 요즘 세대에게 행자 생활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많지만 ‘은사 스님 시집살이’라거나 잡부처럼 부려먹는다는 건 옛말이에요.”

틈틈이 누리는 행자 생활의 즐거움

오전10시40분. 점심공양 준비를 위해 정 행자가 또 다시 행주를 손에 들었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테이블을 닦고 수저와 젓가락을 놓았다. 휴지통과 간장그릇도 삐뚤어진 곳 없이 채웠다. 하루 절반이 같은 일의 반복, 폭풍처럼 흘렀다.

저녁 공양을 준비하기 전, 낮12시부터 약3시30분까지는 정 행자가 누릴 수 있는 자유시간이다. 주로 종각 청소를 하거나 염불 연습을 한다고 했다. 사찰 뒤로 난 지리산 산책로를 따라 걷거나 스님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는 일은 행자 생활의 큰 즐거움 중 하나다. 일반인이라면 쉬이 접할 수 없는 국보와 보물 속에서 먹고 자며, 쉽게 만날 수 없는 선지식들에게 직접 법문을 듣는 특혜도 있다고 했다.

저녁 공양 준비를 돕고 6시30분 저녁 예불에 참석하고 나면 정 행자의 하루가 졌다. 오후9시 사중 모든 불을 꺼지는 시간, 소등을 알리는 종을 치는 것이 그의 마지막 일과였다.

행자들은 종종 ‘끈기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 실제로 막연한 기대를 갖고 절에 들어왔다가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공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스님과 공양주 보살의 꾸짖음을 참지 못해 중도하차하는 경우가 많다. 6개월을 버티지 못하는 그들이 성실하지 않기 때문이라 설명하는 것은 반쪽짜리다. ‘절집 시집살이’ ‘똥군기’ 등은 옛말이 됐지만 본말사마다 제각각인 교육체계, ‘일단 하라’는 구시대적이고 폐쇄적 가르침은 그 이유가 돼준다.

그럼에도 행자 생활을 버티게 하는 건 견고한 초발심과 선배 스님들 몫이다. “부처님은 좋으나 산에 사는 건 싫다”고 고민하던 정 행자에게 쓸데없는 생각 말라는 말 대신 “부처님은 산 속에만 계시지 않다”고 차분히 일러준 은사 스님, 철두철미한 성격 탓에 늘 조급증을 달고 사는 그에게 “아무리 바빠도 지리산 하늘 한번 쳐다 볼 여유를 가지라”고 일러준 강주 스님, 싫은 소리 들어 기가 죽어 있을 때 “다른 때 안그러는 데 그 스님 오늘 좀 기분이 흐린가 보다”며 툭툭 어깨를 두드려준 노스님 말 한마디, “온전한 내 편 하나만 있어도 살아진다”고 정 행자는 말했다.

매일 반복되는 공양 준비, 제 때 종을 치는 일, 공동 공간을 깨끗이 하는 것, 모두 대중 살림의 기본이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일들이다. 모두 내가 아닌 남을 위한 일이라는 점에서도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의 순간들이었다.
 

③강주 혜수스님으로부터 '사미율의' 수업을 듣는 정 행자. ④ 도량석이 시작되고 운고루에 불이 켜지면 그에 맞춰 종각 불을 밝히고 종을 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⑤사시마지를 올린 뒤 부처님께 3배의 예를 올리고 있다.
행자 생활 틈틈이 선배 스님들로부터 교육을 받는다. 강주 혜수스님으로부터 '사미율의' 수업을 듣고 있는 정 행자. 
③강주 혜수스님으로부터 '사미율의' 수업을 듣는 정 행자. ④ 도량석이 시작되고 운고루에 불이 켜지면 그에 맞춰 종각 불을 밝히고 종을 치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⑤사시마지를 올린 뒤 부처님께 3배의 예를 올리고 있다.
정 행자가 사시마지를 올린 뒤 부처님께 3배의 예를 올리고 있다.

화엄사=이경민 기자 kylee@ibulgyo.com

[불교신문3547호/2020년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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