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국의 위기는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터졌다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434년 2월, 서라벌

정월이 막 지나자마자 신국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백제 비유왕이 보낸 사신이었다. 사신은 말 두 마리를 선물로 가져왔다. 갈기와 털이 붉은 갈색으로 빛나는 말과 검은색으로 빛나는 말과 함께 월성으로 온 백제의 사신은 눌지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대전 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엎드린 백제 사신을 담담히 바라보던 눌지의 눈가에 반짝이는 것이 스쳤으나 아무도 보지 못했다. 

“일어나라.”

“황공합니다.”

“백제의 왕께서 덕으로 백성을 품으시고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신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팔수부인은 왜국으로 돌아가셨다지?”

백제의 사신은 백제 황실의 속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눌지의 물음에 깜짝 놀랐다.

“그러하옵니다. 부인을 따르던 이들도 모두 함께 왜국으로 돌아갔사옵니다.”

당황한 내색 없이 대답하는 백제의 사신을 보며 눌지는 속으로 감탄했다.

‘제법이로구나’

“신국은 오랜 세월에 걸쳐 왜국과 적대해왔소. 왜국이 숱하게 신국의 백성을 괴롭히고 식량을 빼앗았기 때문이오. 선왕 때 질자를 보내 화친을 한 적도 있으나 아무 성과를 얻지 못했지.”

“그렇사옵니까?”

“그렇소. 저들은 늘 빈손으로 기세등등하게 쳐들어와서는 원하는 것을 다 약탈했지. 도둑이나 다름없지 않소?”

대전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으나 사신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저들은 군량을 받을 곳이 있는 것처럼 배에 무기만 싣고 와서 신국을 공격할 뿐, 쌀 한 섬 가지고 오지 않소. 그런데도 이기곤 했지. 그 이유가 무엇인 거 같소?”

“전쟁에 능하기 때문 아닐런지요.”

“하하하, 그대의 대답이 참으로 절묘하오.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군.”

눌지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사신은 소름이 돋았다. 

“백제 왕의 성의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주시오. 신국은 오래전부터 고구려와 화친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것이오. 이를 알면서도 백제의 왕께서 이리 마음을 써 주시니 참으로 감사하오. 왕의 마음이 변치 않으신다면 앞으로 백제를 적대하지 않겠소. 왕께서는 부디 지금 확답을 드릴 수 없는 신국의 입장을 헤아려주시길 바라오.”

“뜻 잘 알겠습니다. 말씀 잘 전하겠습니다.”

“잘, 부디 잘 알았기 바라며 부디 잘 전해주시길 바라오.”

눌지는 ‘잘’이라는 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백제의 사신은 대전에서 물러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을에 온 귀한 손님

여름, 눌지는 복호와 함께 말을 타고 들판을 달렸다. 날은 무더웠으나 얼굴에 부딪혀오는 바람이 상쾌했다. 명활산성에 도착한 눌지는 말에서 내렸다.

“매번 느끼지만 참으로 명마이옵니다.”

눌지의 뒤를 따라 말에서 내린 복호가 자신이 탔던 검은 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구려의 기병은 어떠하더냐?”

“예?”

“고구려의 말들도 이처럼 뛰어나지. 빠르고 인내심도 강하고 충성심도 강하다. 전쟁에도 능하지. 고구려의 군마를 볼 때면 늘 부러웠다.”

“그걸 어찌…”

“기억이 안 날 수도 있겠구나. 우리 세 형제가 모두 어렸을 때, 고구려에 원병을 청했던 적이 있지 않느냐.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말이다.”

“아, 실성 마립간께서 질자로 고구려에 가 계실 때 말이지요?”

“그렇다.”

눌지의 눈이 아득해졌다.

“가야, 백제와 손을 잡은 왜군이 끝도 없이 신국으로 쳐들어왔다. 서라벌이 공격을 당했고 월성조차 위태로웠다. 그때, 고구려의 대왕이 신국을 구원하러 대군을 몰고 내려왔다.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대왕과 기병들이 지나는 자리마다 시체가 즐비했다. 말과 한 몸이 된 장수들, 주인과 한 몸이 되어 싸우던 말들. 기병의 기세는 정말 대단했지.”

“고구려의 말이 뛰어나긴 합니다. 직접 가서 보니 말을 관리하는 군사들의 대우도 좋았습니다.”

“직접 보니 북방의 말이 확실히 뛰어나구나. 왜국의 왕도 백제로부터 이런 선물을 받았을 테지. 얼마나 기뻤을꼬. 백제의 학자와 승려와 기술자들 그리고 태자까지 갔을 땐 얼마나 좋았겠느냐? 군사가 아니라 무엇이라도 내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형님…”

“백제가 과연 왜국과 잡은 손을 놓을 수 있겠느냐? 아니, 왜국은 절대 백제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백제의 왕이 먼저 화친을 하겠다고 하였으니 스스로 한 말을 지킬 것입니다.”

눌지는 복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순수한 마음이 어여쁘긴 했으나 군왕이 되기엔 부족했다. 오히려 복호의 아내이자 고구려 출신인 보미가 지략은 훨씬 뛰어났다. 눌지는 미소를 지으며 복호에게 말했다.

“너의 그 순수하고 선량한 마음을 백제왕에게 보여주고 싶구나.”

눌지가 두 마리 명마를 받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백제의 비유왕은 고심 끝에 추수가 끝난 9월, 하얀 매를 다시 선물로 보냈다. 하얀 매는 보기 드문 동물로 상서롭게 여겨지고 있었다. 흰 매는 눌지의 존엄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어 월성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백제 비유왕의 마음을 확인한 눌지도 답례를 했다. 사신으로 임명된 복호가 황금과 구슬을 가지고 백제에 간 것이다. 복호를 만난 비유왕은 복호가 가져온 선물보다 복호를 사신으로 보낸 눌지의 속마음이 진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북방의 절대 강자 고구려는 남하를 시작했고 백제는 오랫동안 적대했던 신국과 손을 잡고 동맹을 결성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시대였다.


복호를 만난 백제 비유왕은 
복호가 가져온 선물보다 
그를 사신으로 보낸 
눌지의 속마음이 
진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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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절대 강자 고구려는 
남하를 시작했고 백제는 
오랫동안 적대했던 신국과 
손을 잡고 동맹을 결성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시대
신국의 강릉 성주 삼직이 
고구려 장수를 죽이면서…

 

뜻밖의 위기 

백제와 신라는 다툼 없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440년 왜국이 신국의 남쪽과 동쪽을 침범하고 백성을 약탈했다. 괘씸한 일이었으나 피해는 크지 않았다. 왜군이 신국에 머문 기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별다른 소득이 없이 물러갔다. 백제에서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제로부터 하얀 매를 선물 받은 후 10년이 흐르자 신국과 백제는 관계는 점점 화기애애해졌다. 평화에 취해있던 그때 왜국이 신국을 재차 침범했다. 서라벌에 병력을 집중 배치한 왜군은 금성 외곽을 포위했다. 서라벌 안에는 고구려군이 있었으나 왜군의 병력은 압도적이었다. 

설상가상 왜군은 외성을 뚫고 금성을 에워쌌다. 왕궁 월성이 있는, 신라의 수도 금성이 함락될 위기였다. 눌지는 금성 안으로 몰려온 백성들과 함께 수성전을 펼쳤다. 다행히 고구려군은 수성전에도 능했다. 고구려군과 합세한 신국의 군대와 백성들은 장장 열흘 동안 금성을 수비했다. 무서운 기세로 금성을 공격하던 왜군은 열흘 만에 소득 없이 물러가야 했다. 가져온 식량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백제가 왜군에게 식량을 지원해주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게다가 계절이 아직 봄이라 신국에서 식량을 구할 수도 없었다. 물러나는 왜군을 보며 신국의 백성들은 환호했다. 왜군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금성을 지켜낸 백성들은 용기와 자긍심을 얻었다. 백성들의 입에서 ‘살 것 같다, 살 만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생각한 순간, 위기는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터졌다. 

450년 7월, 눌지의 분노한 목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뭐라? 다시 말하라. 뭐라 했는가?”

한여름이었지만 대신들은 오싹함을 느꼈다. 한숨을 쉰 눌지가 이번에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벌찬, 그대가 말해보시오. 누가 누구를 죽였다고?”

“하슬라(강릉) 성주 삼직이 고구려 장수를 죽였다 하옵니다.”

창백한 얼굴의 대신이 온몸을 떨며 말했다. 말을 마치자 식은땀이 쏟아졌다. 

“신국 신하의 손에 고구려 장수가 죽었다는 말인가? 그것도 신국에서!”

눌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보좌에 주저앉았다.

“하슬라 성주에게 어찌 그런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는지 물었는가?”

눌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사내가 흰옷을 입고 양손이 묶인 채 맨발로 대전에 들어섰다. 

“하슬라 성주 삼직 들었사옵니다.”

감았던 눈을 번쩍 뜬 눌지는 걸어오는 삼직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저자가 삼직이로구나. 저자는 과연 신국의 충신인가 아니면 신국을 망하게 할 인물인가?’ 

[불교신문3546호/2019년12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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