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의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소”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433년 봄, 서라벌

10년이 꿈처럼 흘러갔다. 눌지와 복호, 미해는 사랑하는 아내와 행복했고 자식들이 태어났다. 눌지는 아들 자비와 딸 조생을, 복호는 아들 습보와 딸 보혜를, 미해는 아들 구천과 딸 파호와 수리를 얻었다. 이른 봄이었지만 오랜만에 날씨가 따뜻했다. 미해는 방문을 열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청아의 손을 잡고 봄을 감상하며 말했다.

“정말 꿈만 같소.”

청아를 바라보는 미해의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으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미해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었다. 원래도 하얀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고 푹 꺼진 눈 밑은 아침이면 수염이 자란 것처럼 시커멓곤 했다.

“왜국에 있을 적에는 한 번도 부처님을 찾지 않았지. 낯도 설고 물도 설은 그곳에서 가장 어색한 것이 부처님이었소. 저들이 한없이 신봉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화가 나기도 했지. 저들의 바람은 죄다 들어주면서 어찌 나의 작은 소원 하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들어주지 않는가 원망하기도 했다오.”

“지금은 어떠신가요?”

“내 몸만 성하다면 당신과 함께 날마다 부처님을 뵈러 가고 싶지.”

청아는 말없이 미해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저는 이미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당신과 다시 만나 부부가 되었고, 아이들이 태어났으니 더 바랄 것이 없지요.”

“부인이 소원을 모두 이루었다니 참으로 다행이오. 헌데 나는 아직 소원을 이루지 못했소. 당신과 함께 백년해로하며 아이들이 짝을 찾는 모습을 보고, 손자와 손녀를 품에 안아보고 싶었으나 꿈과 같은 이야기가 되었소.”

말을 마친 미해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힘이 들면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내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부인도 알 것이오. 오늘은 부인과 밀린 이야기를 실컷 나누어 볼 참이니 말리지 마오.”

미해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본 청아가 미소를 지었다. 미해는 청아의 따뜻한 손을 꼭 잡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돌이켜보니 모든 것이 당연하오. 실성이 나를 왜국에 보낸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 그때는 실성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미움만 가득했는데 이제는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소.”

“그래도 저는 그분이 원망스럽습니다.”

미해는 청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원망하지 마시오. 원망하는 마음은 뿌리가 깊고 힘이 무척 강해서 상대방뿐 아니라 나를 병들게 한다오. 나를 보면 알지 않소?”

“그것이 어찌 원망하는 마음 때문이란 말입니까?”

청아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원망했지. 원망하고말고. 이역만리 왜국에 간 내가 종일 할 일도 없이 멍하니 앉아서 무엇을 했겠소. 처음에는 실성을, 나중에는 형과 어머니를 그리고 아버지를 끝없이 원망했소. 직접 해치지는 못했으나 마음속으로 실성의 뺨을 수백 번 내려쳤고, 실성의 가슴을 수십 번 찔렀소. 그렇게 날마다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데 내가 병이 나지 않을 방법이 있겠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병이 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소.”

“저와 우리 아이들은 어찌 살라고 그리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부인, 나는 태어나서 지금 가장 강한 사람이 되었소. 강한 사람이 되었기에 지난날 나의 잘못을 알고 인정했으며 부인과 아이들을 위해 나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소.”

“그리 말씀하시니 두렵습니다.”

“부인이 구천을 가지고 난 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부처님께 기도했소. 지난날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했던 것을 용서하시고 부인과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달라고.”

“저는 부처님께 다른 기도를 했습니다. 제 기도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궁금하오. 부인은 부처님을 뵐 때마다 무엇을 기도했소?”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당신과 다시 부부로 만나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조금 더 복을 베풀어 주신다면 우리 아이들도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도 빌었습니다.”

“부인의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소. 더 바랄 것이 없소.”

미해는 청아의 가슴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일어나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나의 소원도 부인과 같소. 내 지금은 먼저 가지만 다음 생이 있다면 꼭 다시 만나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소.”

청아는 붉어진 눈으로 미해의 귀에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이번 생에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미해는 할 말을 다 한 사람처럼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며칠 후, 미해는 꽃이 지듯 숨을 거두었다. 미해를 품에 안고 임종을 지킨 청아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부부의 정은 한없이 깊었으나 영원할 것 같은 행복은 너무나 짧아 다음 생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미해는 꽃이 지듯 
숨을 거두었다
미해를 품에 안고 
임종을 지킨 아내 청아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번 생에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부부의 정은 한없이 깊었으나 
영원할 것 같은 행복은 
너무나 짧아 
다음 생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고구려와 척 진 백제는
신국과의 화친을 청해오고 
눌지는 동맹을 맺기 전까지 
복호나 보미 부인은
이 사실을 몰라야 한다고 …


새로운 동맹

하늘이 삼형제를 가엽게 여겨 10년의 세월을 선물처럼 준 것처럼 서라벌에 돌아온 지 10년째 되던 해, 미해는 세상을 떠났다. 눌지와 복호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지만 가장 서러운 것은 미해의 아내 청아였다. 그녀에게 미해는 10년이 넘는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난 정인이자 아버지 박제상이 보내준 사람이었다. 눌지는 청아에게 월성에 남을 것을 권했다. 구천과 파호, 수리까지 세 아이를 데리고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청아는 어머니 치술 부인이 있는 월성에 남았다. 눈물조차 마른 듯 영혼 없는 나날을 보내며 슬픔을 달래는 청아를 대신하여 눌지의 아내 아로 부인은 구천과 파호, 수리를 살뜰하게 거두었다. 

“어머니, 오늘도 파호가 오나요?”

아침부터 아로궁을 찾은 자비가 들뜬 얼굴로 물었다. 눌지와 아로 부인의 장남 자비는 요즘 들어 부쩍 어린 사촌 여동생이 신경 쓰였다. 아로 부인이 파호와 수리를 거두기 전까지 자비의 곁을 단단히 지킨 사촌은 복호와 보미의 딸 보혜였다. 보미의 손에서 자란 보혜는 자비의 아내가 되어 신국의 왕비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보혜는 의젓하고 오만했고, 틈만 나면 자비의 곁에 있으려 했다. 반면 파호와 수리는 가족들끼리 지내는 것을 훨씬 좋아했다. 부르지 않으면 먼저 오는 법이 없었다. 

“참 좋은 짝이 될 것이오. 그렇지 않소?”

처소로 돌아가는 보혜와 파호를 본 눌지가 아로 부인에게 말했다. 

“아이들끼리 사이가 좋아 다행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오. 몇 년 후 아이들이 자라면 보혜를 자비의 아내로 삼을 것이오.”

“네? 왕비를 배출해온 가문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이번 기회에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할 것이오.”

아로 부인을 바라보는 눌지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이럴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로 부인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오늘 이곳까지 걸음 하신 것을 보면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아로 부인의 말에 눌지는 비로소 굳었던 얼굴을 풀며 말했다. 

“부인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소? 실은 백제가 화친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소.”

“백제는 왜와 결탁하여 수시로 신국을 압박하는 나라가 아니옵니까? 고구려와도 앙숙이라고 들었습니다.”

“부인의 말이 맞소. 그런데 그것은 지난 일이오. 지금 백제의 왕은 전쟁보다 화친이 필요하다오. 민심을 안정시켜야 하기 때문이오.”

“백제 왕실이 민심을 동요하게 하기라도 했나요?”

“그렇소, 우리에겐 다행인 일이지. 지금 백제 왕은 조카 구이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소. 구이신왕은 왜국 왕의 외손자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어머니와 간신들이 권력을 장악해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지. 지금의 왕은 왜국의 공주인 형수를 제압하고 치열한 다툼 끝에 왕위를 차지했소.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쟁은 언감생심이요, 이웃 나라에서 먼저 공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처지지.”

심각한 얼굴로 눌지의 말을 듣던 아로 부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화친에 응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야 저쪽에서 어찌 나오는지를 보아야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눌지를 보며 아로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참, 백제와 정식으로 동맹을 맺기 전까지 복호나 보미 부인은 이 사실을 몰랐으면 하오. 특히 보미 부인은 고구려인이니 우리가 백제와 손을 잡는 것을 알게 되면 불편할 것이오.”

한순간 차가워진 눌지의 얼굴을 본 아로 부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교신문3544호/2019년12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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