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법정’으로 부처님 시봉하도록 하여라”

오대산으로 출가 위해 상경
대각사 머물다 폭설로 좌절

효봉스님 인근 선학원 주석
소식 듣고 찾아가 출가 허락
‘法頂’법명 받고 미래사로

법정스님이 출가를 결심하고 상경하여 ‘고향에서 가장 먼 곳’인 오대산 월정사로 가기 위해 머물렀던 서울 대각사의 현재 모습.
법정스님이 출가를 결심하고 상경하여 ‘고향에서 가장 먼 곳’인 오대산 월정사로 가기 위해 머물렀던 서울 대각사의 현재 모습.

1955년 겨울의 입로에 출가를 결행한 법정스님은 오대산을 향하기 위해 목포역에서 기차를 몸을 싣는다. 출가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많지만 출가계기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우선 친구인 박광순 전남대 명예교수는 한국 전쟁의 전화로 인해 폐허가 된 국내정세에서 젊은 청년들이 겪어야 했던 미래에 대한 참담함도 법정스님은 예외가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런 와중에 불교에 심취해 있었던 스님은 전쟁의 참화 속에 세상의 무상함을 몸을 체험했을 것으로 본다.

출가의 결심을 굳히게 된 줄탁동시(啐啄同時)의 인연은 스님이 목포의 정광정혜원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법정스님은 여러 인연을 만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중 한명이 고은시인(당시 일초스님)이다. 고은시인이 본지에 증언한 내용은 2015년과 2017년에 인터뷰 한 두 곳에서 보인다.

2015년 1월19일 기사에 고은시인은 “정화운동을 하다가 한번은 목포에서 강연회를 가졌는데, 당시 주제가 ‘각존과 실존’이었어. 젊은 중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들먹이며 불교 이론을 설명하자, 난리가 났지. 청년들이 앞다퉈 강연을 들었어. 법정스님도 그때 강연을 들은 인연으로 출가로 이어졌어.”라고 회고하고 있다.

2017년 5월16일 기사에서는 제법 길게 언급하고 있다.

“목포 정혜사에 한때 체류하며 목포극장에서 ‘각존과 실존’ 강연을 했습니다. 그때 목포의 청년지식인 대학생들이 나의 주위에 마구 떼거리로 모여들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목포상과대학을 중퇴한 박재철입니다. 그는 해남 우수영이 고향인데 목포시내에 숙식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절에서 숙식할 수 있는 청년학생회 총무를 맡게 해서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다 입산출가를 결심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오대산으로 갈까 하다 내 사제 일관(박완일)이 통영 미래사로 가는 길에 그를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내 영향을 많이 받던 시절입니다. 그 뒤 미래사에서 함께 지내다 그는 초발심자경문을 익히고 곧 행자에서 사미계를 받았습니다. 효봉문중의 일원이 된 것이지요.”

법정스님은 <버리고 떠나기> 책 가운데 ‘아직 끝나지 않은 출가’라는 글에서 자신의 출가인연을 언급한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그랬듯이 한 핏줄 같은 이웃끼리 총부리를 마주대고 미쳐 날뛰던 동족상잔인 6.25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존재에 대한 물음 앞에 마주서지 않을 수 없었다. 사상과 이념이 무엇이기에 같은 형제와 겨레끼리 물고 뜯기며 피를 흘려야 하는지 어린 나이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학창시절에 밤을 새우가면서 묻고 또 물으면서 고뇌와 방황의 한 시절을 보냈다. …(중략)… 스물네 살 때 마침내 입사출가를 결심하고 싸락눈이 내리는 어느 날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온 그때의 심경은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전이 되어 포로 송환이 있을 때 남쪽도 북쪽도 마다하고 제 3국을 선택, 한반도를 떠나간 사람들의 바로 그런 심정이었다.”

맨 처음 법정스님은 출가를 결행하며 오대산으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으로 보인다. 왜 오대산으로 출가를 하려 했는지에 대해 법정스님은 그의 저서에서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스님은 출가는 깊은 산중으로 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중의 한 곳이 오대산 월정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에 대해 홍정근 (사)맑고 향기롭게 이사는 “스님이 오대산으로 가려고 한 이유는 고향에서 멀기도 했고, 그곳에 주석하고 계셨던 탄허스님과 같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서울행 기차에 오른 법정스님은 서울역에 내려서 종로 봉익동 대각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문 뒤 오대산으로 가려로 했다. 정찬주 소설가는 그의 저서 <소설 무소유>에서 대각사에서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썼다.

“청년은 한나절을 걸어서 대각사에 도착했다. 한옥 민가들이 대각사를 둘러싸고 있었다. 상점들도 대각사 일주문 앞까지 들어서 있었다. 대각사 법당은 다른 절과 조금 달랐다. 불단에 부처님뿐만 아니라 용성스님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었다. 법당 안은 용성스님을 추앙하는 분위기가 짙었다. 용성스님의 오도송과 열반송이 법당 벽에 붙어 있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그곳에서 월정사 스님을 만난다. 때마침 대각사에 머물고 있던 월정사 스님은 오대산 월정사의 소식을 비교적 소상하게 전한다.

“지금은 월정사에 폭설이 내려 갈 수 없소. 산길이 뚫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오.”

그 시점에서 법정스님은 상당히 당혹해 한다. 이미 출가할 생각으로 고향을 떠나온 몸이라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법정스님은 안국동 선학원에 주석하고 있는 효봉스님을 소개받는다.

법정스님은 이미 목포 정광정혜원에서 효봉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일초스님(고은시인)의 은사스님이 효봉스님이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스승의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들었을 것이다. 월정사 스님은 법정스님에게 효봉스님이 인근 안국동의 선학원에 주석하고 있으며 그곳에 가면 친견할 수 있다고 귀띔을 해 준다. 그리하여 법정스님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은사 효봉스님과 조우하게 된다. 정찬주 소설가는 효봉스님과 법정스님과의 만남을 드라마틱하게 서술하고 있다.

“시자스님이 법당 문을 열자, 미소를 머금은 효봉스님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안개 저편에서 산 하나가 나타난 듯했다. 청년은 스님을 본 순간 고압정류에 감전된 것처럼 숨이 막혔다. 기개가 산 같고, 마음이 바다같은 풍모였다. 자애로우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선풍도골의 모습이었다. 스님은 법당 문턱을 넘으면서 잠시 시작의 부축을 받았다. 청년(법정스님)을 잠깐 응시하기도 했다. 찰나였지만 이심전심으로 빛살같은 것이 관통했다.”

법정스님의 수필집 <버리고 떠나기>에서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선학원에서 효봉선사를 친견하고 출가의 결심을 말씀드렸다. 내 얼굴을 살펴보고 생년월일을 묻더니 그 자리에서 쾌히 승낙을 하셨다. 그날로 조실방에서 삭발, 먹물옷을 갈아입고 선사께 인사드리자 선뜻 알아보지 못했다. 곁에서 누군가 방금 삭발하고 옷 갈아입은 행자라고 말씀드리니 ‘허허, 구참(舊參)같구나!’라고 하셨다. 구참이란 오래된 중이란 뜻. 삭발하고 먹물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 듯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나는 그 길로 밖에 나가 종로통을 한바퀴 돌았다.”

선학원에서 효봉스님과의 만남은 ‘청년 박재철’이 ‘법정스님’으로 태어나는 시발점이 되었다.

해남 우수영 선두리 마을에서 태어나서 목포에서의 학창시절을 합해 스물 네 살의 ‘박재철’이라는 삶을 한 다발로 묶어냈다. ‘청년 박재철’은 어린시절 바닷가에서 뛰놀던 유년의 추억부터 목포에서 학우들과 어울리며 고락을 같이했던 일들이 삭도에서 잘라나가는 무명초를 따라 마음 한 켠에 접었다. 그리고 회색법복에 감겨진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새로운 삶의 청사진을 비추어 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을 것이다.

삭발을 끝내자 효봉스님은 법명을 내렸다. “오늘부터 너는 ‘법정(法頂)’으로 부처님을 시봉하도록 해라.”

효봉스님은 곧바로 법정스님을 통영 미래사로 내려 보냈다. 이렇게 해서 법정스님의 수행자 생활은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스님은 출가 후 평생 법정이라는 법명을 유지했다. 불교신문과 인연을 맺어 글을 쓸 때 ‘소소산인’ ‘청안’ 등 필명을 가끔씩 사용하긴 했지만 스승으로 받은 ‘법정’이라는 법명으로 생을 일관했다. 법명 앞에 수식여구가 있다면 ‘비구’라는 용어뿐이었다. ‘비구 법정’이라는 법명만으로도 스님은 올곧은 수행자의 삶을 세상에 넉넉히 보여주고도 남을 정도였다.
 

법정스님의 스승인 효봉스님과 만난 서울 안국동 선학원 전경.
법정스님의 스승인 효봉스님과 만난 서울 안국동 선학원 전경.
서울 대각사 안에 설치돼 있는 용성스님에 대한 소개 시설.
서울 대각사 안에 설치돼 있는 용성스님에 대한 소개 시설.

※ 취재협조 : (사)맑고향기롭게

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불교신문3544호/2019년12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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