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현
김숙현

아파트 광장 사이 길을 걷다가 버려진 헌책 묶음들을 발견하면 어김없이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아, 또 한 사람의 빛났던 한 시대가 끝났구나!” 게다가 그 책 더미에서 법정스님의 산문집이나 역경원 문고 등의 불서라도 눈에 띄게 되면 마치 내 자신이 헐벗은 채로 길에 나앉은 듯한 민망함이 앞을 가린다. 

‘죽어가는 노인은 불타는 도서관과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지만 개인 도서가 이렇게 버려질 경우면 이미 당사자에게 큰 변고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거기에 허드레 책이 아닌 정품 도서가 아무렇잖게 버려졌다는 것은 집안에 ‘지혜의 보고’를 알아보는 계승자가 따로 없다는 뜻이리라. 

시인이자 부산일보 사장을 역임했던 김상훈(金尙勳)씨의 타계 3주기를 맞아 ‘민립(民笠) 김상훈 시비’ 가 지난 10월 부산 기장군의 백운공원묘원에 세워졌다. 1936년 경북 울릉군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한 김 시인은 부산일보 논설위원으로 출발, 주필, 전무이사를 거쳐 부산일보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와 함께 부산문인협회 회장, 부산시조시인협회 회장, 민족시가연구소 이사장 등으로 활약하며 부산 지역의 문화, 문학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우륵의 춤> <다시 송라에서> <내 구름 되거든 자네 바람되게> 등 수많은 저서를 출간한 김시인은 특히 동국대 총동창회 부회장,재부 동창회장을 오래 맡아 동악인들을 결속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내구름 되거든/자네 바람 되게//그래서/너무 세게나 급하게나 말고/알맞게 날 上天으로 밀어올려//天涯에서 天涯로/유유히 떠 놀게나 하게//자네 구름 되거든/나도 바람 될라네….(‘내 구름 되거든’에서) 

김시인은 평소 집무실에서나 퇴임 뒤 연구실에서나 책 더미에 파묻혀 있을 만큼 애서가였다. 소장했던 서화와 도자기 등은 타계하기 전 경북 김천에 설립된 기념관에 전시됐으나 10여만권의 장서는 가뭇없이 흩어져버렸다는 후문. ‘불타는 도서관’의 허망함을 다시한번 되새기게 한다.

[불교신문3543호/2019년12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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