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쟁, 이제는 보다 분석적으로 접근할 때다”
“화쟁, 이제는 보다 분석적으로 접근할 때다”
  • 자현스님 논설위원 · 중앙승가대 교수
  • 승인 2019.12.13 14:49
  •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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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원효스님의 화쟁, 이상인가 현실인가
화쟁을 버리고 현실에 직시하라
자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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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열어구’에는 용 잡는 법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평만이라는 사람이 지리익에게 천금을 주고 3년 동안 용 잡는 법을 배워 완성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하산했을 때 용이 없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주평만은 세인들의 비웃음거리만 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생긴 말이 ‘도룡지기(屠龍之技)’다. 

도룡지기는 ‘크기는 하지만 현실적이지 않은 쓸모없음’을 의미한다. 원효의 화쟁 역시 현대적으로 본다면 그저 어쭙잖은 도룡지기일 뿐이다. <신약> ‘마태’에서 예수는 “누구든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왼뺨도 때리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은 분명 그렇지 않은가!

삼성의 반도체가 지금과 같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펼친 지난한 치킨 게임이 있다. 사활이 걸린 상황에서 예수의 말은 너무 이상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화쟁은 어떤 면에서는 예수보다도 더 이상적이다.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원효의 화쟁은 ‘본질적인 방어기제’와 ‘철학적인 의미’ 외에 실질적인 가치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나는 정확한 사실판단과 분석에 기초하지 않는 화쟁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성(佛性)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인간 아니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은 어떤가? 부잣집 반려동물 양육비면, 기아에 허덕이는 몇 사람의 아이들을 살리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올해만 우리나라에서 생활고를 비관해 일가족이 자살한 사건이 17건에 달하며, 이 중에는 7월30일에 보도된 탈북민 모자의 아사(餓死)사건도 있다. 비만에 따른 다이어트가 화두인 시대에 우리 사회의 그늘에는 아사자도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화쟁이 과연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화쟁과 같은 원론적인 논의보다는 명확한 현상분석에 따른 제도보안을 통해, 복지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타당한 해법이 아닐까?!

나는 화쟁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종교적이고 상징적일 수는 있어도 현실적이지는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화쟁은 현실과는 논리적 층위가 다른 관점인 셈이다. 종교는 인간 행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일정 부분에서는 이상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공허함에 매몰된다면, 이는 무가치함에 불과할 뿐이다. 즉 최소한 ‘도룡지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 원효 화쟁의 기저에는 유심주의와 깨침을 지상과제로 여기는 본체론적인 깨침주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다종교가 경쟁하는 현대사회에는 대단히 위험하다. 깨달음이 무조건적인 정당성을 확보하면, 타자와의 관계인 윤리성이 붕괴하기 때문이다. 원효의 주체적인 파계와 합리화는 이런 판단오류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나는 과부궁을 찾아 들어가는 사람이 깨친 자이며, 위대한 보살이라는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부처님께서는 왜 출가하고 계율을 제정하셨겠는가. 또 원효가 맞다면, 조계종은 한용운의 주장처럼 대처를 용인해야 하는 것 아닌가?

원효 같은 이는 아웃사이더일 수는 있어도 인사이더가 되어서는 안 된다. 또 원효의 화쟁 역시 이치적으로는 맞지만 현실에서는 틀린다는 점 역시 인정되어야 한다. 음식 그림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듯, 이제는 명실의 문제를 따져서 보다 분석적으로 접근할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불교는 신기루를 좇는 일탈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화쟁, 정확한 관점과 분석이 우선’이라는 자현스님 글에 대해 제일 먼저 반박 글을 보내왔던 황건 인하대 교수가 자현스님의 두 건의 재반박 글이 보도된 이후 ‘화쟁사상 적용의 제한과 원효의 계율관’에 대한 글을 다시 보내왔다. 비슷한 시기 자현스님은 ‘화쟁을 버리고 현실에 직시하라’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한 글을 보내왔다. 두 필자 모두 ‘화쟁’과 관련한 또 다른 주장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글로 볼 수 있다. 지상논쟁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게재한다. 

[불교신문3543호/2019년12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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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행 2019-12-19 21:41:02
예불도 참석 안 하시면서 기도책을 쓰셨다고요?
하기사 이 스님 염불 목소리 들어보니
기도 안 한 목소리이긴 하더라구요....

금강산 2019-12-19 08:59:22
십우도의 마지막장면이 바로 입전수수인 것은 바로 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적어도 원효스님과 경허스님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려거든 그 정도 경지에 이른 다음에 하라.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것만 갖고 판단하는 계금취견에서 벗어나시길!

금강산 2019-12-19 08:58:00
지해종자 하나가 불교를 다 망치는구나. 월정사에 기거하면서 조석예불과 사시예불도 제대로 참석안하면서 스님의 기도법을 쓰지를 않나. 얕은 알음알이로 원효스님을 거사로 비판하다니(경허스님도 비판하고 싶겠지만 후환이 두려워 뺐겠지) 그 과보가 두렵다. 전에 율사이신 모스님께서 한국불교의 비극이 원효와 경허같은 거사들이 롤모델인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다 그 과보로 눈이 멀어버렸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아상을 버리는 것이다. 그 궁극에 이르러서 결국 남는 것은 바로 승상(스님이라는 상)이다. 원효스님과 경허스님은 모든 사람들이 큰 스님이라고 자신들을 존경하는 그 위치에서 그 스님이라는 지위까지도 버렸다. 그것이 또하나의 상이 되었기에.

최강길 2019-12-17 08:55:11
원효스님의 팥죽이 끓는 모습을 보면서 보살로 표현한 것은 정말로 평등사상을 말씀하신 것이다. 모두가 보살이라는 관점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불가에서는 모두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왜 중생들의 불성을 깨치려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중생들의 불성을 깨치려면 중생들을 불성을 가진 부처님으로 대접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불성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스님이 중생심으로 옳고 그르다는 편견을 가지면 안되는 것이다. 옳고 그르다는 것은 불성을 깨치기 위해서 방편으로 할 수는 있어도 아상과 아집으로 그런 방편을 써서는 안된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먼저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 곧 전도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고맙습니다.

최강길 2019-12-17 08:46:30
원효의 일심은 평등사상이기 때문에 이 험악한 세상에 모두에게 기회를 주게 되는 것이다. 기회가 없기 때문에 불평등한 사회가 되는 것이고 그 속에서 힘이 없는 존재는 나아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 일심을 어떻게 중생들에게 전달하고 적용시킬 수가 있는 것은 불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 원효스님에게 찾게 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원효스님이 그 방법을 말씀하셨는데 그 방법을 적용하지 않으면서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오판이라고 할 수가 있다.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평등사회 즉 모두가 투명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남한의 사회에서는 적용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그것의 주체는 일단은 불교종단부터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