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원효스님의 화쟁, 이상인가 현실인가
화쟁사상 적용의 제한과 원효의 계율관

황건
황건

원효대사(617~686, 이하 원효)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근대 들어 1918년 원효에 대한 최초의 글이 발표된 이래 800편이 넘는 원효 관련 연구만으로도 원효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를 가늠할 수 있다(고영섭. 해제: 원효 연구의 언제와 오늘. 예문동양사상연구원, 고영섭 편저. 한국의 사상가 10인 원효. 서울: 예문서원, 2002:19-25). 

학술적으로는 원효의 사상과 그 사상의 실천에 대하여 비판하는 논문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최근 학술 이외의 영역에서 그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이러한 비판은 원효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재가자들도 그에 대한 관심과 그러한 비판이 과연 근거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

이 글의 목적은 원효의 화쟁사상과 그의 계율관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고찰하고 요약하여 사부대중에게 알리는데 있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의 학술연구정보서비스(Research Information Sharing Service, RISS) 검색에서 ‘원효’ 및 ‘화쟁’의 키워드(제목과 초록에 ‘원효’와 ‘화쟁’이 들어있는 경우)로 검색하니 국내학술지논문 284편이 검색됐다. 제목과 초록을 검토한 결과, 이 중 원효의 화쟁사상에 대하여 비판적인 논문은 찾아볼 수 없었으나, 원효의 화쟁을 적용할 때 제한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논문이 한 편 있었다(박태원. 주제4: 화쟁사상을 둘러싼 쟁점 검토. 한국불교사연구 2013;2:125-70). 

박태원에 따르면, 기존의 화쟁사상 연구 중에 원효 사상 전체를 화쟁의 논리에 의거하여 독해하려는 방식에서는 화쟁사상과 원효사상은 구별할 필요가 없이 완전히 하나로 결합되므로 ‘화쟁’이라는 말의 의미와 범주를 지나치게 확대시키는 위험이 있다고 하였다.

‘화쟁’은 구체적 쟁론들을 염두에 둔 문제 해결의 태도를 담고 있는 언어이므로, 화쟁사상의 범주는 ‘불교 이론에 관한 상이한 견해들’로, 화쟁의 대상은 ‘불교 이론에 관한 상이한 견해들로 인해 생겨난 배타적 대립과 불화 및 상호불통 상황’이라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했다.

화쟁의 논리 형식을 펼쳐내는 ‘원천’은 ‘긍정·부정의 적절한 변별과 판단을 위한 경계선 포착력’을 근원적 수준에서 계발시키고 발전시켜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원효의 화쟁 논법이 그러한 원천에 기반하는 것이라면, 화쟁 논법은 불교적 쟁론뿐 아니라 세간의 쟁론 일반의 치유에도 유효할 수 있는 보편적 화쟁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만약 화쟁 논법의 원천에서 그러한 내용과 의미를 포착할 수 없다면, 화쟁사상에는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원효’와 ‘계율’로 검색하면 국내학술지논문 55편이, ‘원효’와 ‘계율관’으로 검색하니 국내학술지논문 10편이 검색됐다. 그 중 혹자의 비판인 그의 ‘파계’에 대하여 객관적인 답을 잘 줄 수 있는 논문들이(최유진. 원효의 계율관. 불교연구 2013;38:123-54, 강명진. 원효의 윤리관. 정신개벽논집 1985;4:133-64) 있었다.

원효는 승려로서 활동하다가 파계를 하고 인생의 후반부는 거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최유진은 원효는 계율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불교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계율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다양한 계율서중에 어느 특정한 계율서를 중시하는 입장이라기보다 대승의 범망계와 유가계 모두를 중시하여 여러 계율서를 종합해서 조화를 찾으려 했다. 대승계만을 중시한 것이 아니며 출가자들을 위한 소위 소승의 계율도 무시하지 않았는데, 이는 조화를 중시하는 원효의 기본적인 입장과도 부합한다고 하였다.

원효는 <보살계본지범요기>에서 계율을 통해서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였으며,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제도를 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 행위라면 표면상 계율에 어긋난 것처럼 보여도 결코 그렇지 않고 오히려 복이 된다고 했다. 계율은 단순히 깨달음으로 가는 중요한 덕목 정도가 아니며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대승 계율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출가와 재가의 문제로는 초기 <발심수행장>에서는 출가 중심이고 출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나, <금강삼매경론>에서는 출가와 재가에 걸림 없음을 강조했다. 원효는 그의 전체 사상적 특색인 일심, 화쟁과 중생제도에 입각하여 계율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다. 

강명진은 원효에게 ‘윤리’는 인간을 구속하는 어떤 법칙만이 아니라, 인간을 자연스럽게 인간다운 길로 이끌어 주며, 자기의 인격을 완성하고, 시비, 선악을 구별하여 바람직한 생활을 하는 것, 즉 서로 대립적이 아닌 관계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질서를 찾는 것이었다고 했다. 윤리란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재해석의 힘을 시대마다 잃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위와 같이, 원효대사의 ‘화쟁사상’ 자체를 학술적으로 비판하는 논문은 거의 없었으며, 다만 제한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논문이 한 편 있을 뿐이다. 그의 계율관에 관한 논문들을 보면 승려로서 활동하다가 인생의 후반부를 거사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도 시대에 따라 윤리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학자는 비학술적인 칼럼에서도, 근거에 바탕한(Evidence based) 글을 써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원효는 그 자신은 ‘권위’를 벗어놓고 낮은 곳으로 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자현스님(염중섭, 자장의 입당목적과 년도에 대한 타당성 검토 사학연구 2015;118:79~122)은 “한국사찰에서 개산이나 창건을 끌어 올려 아도·자장·원효·도선 등과 결부시키는 것도, 해당 사찰의 유구한 역사와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왜곡의 개연성 이 성립한다”며, “민지가 오대산본기중 본기(本傳)․전(傳)․기(記)를 원효의 찬술로 적은 것은 원효의 권위를 빌리기 위한 후대의 윤색으로 판단된다”고 원효의 권위를 강조한 바 있다.

이 글을 만해 한용운의 ‘차라리’라는 시로 마무리하려 한다.

“님이여 나를 책망하랴거든 차라리 큰 소리로 말씀하야 주서요. 침묵으로 책망하지 말고. 침묵으로 책망하는 것은 아픈 마음을 얼음바늘로 찌르는 것입니다.” 
 

‘화쟁, 정확한 관점과 분석이 우선’이라는 자현스님 글에 대해 제일 먼저 반박 글을 보내왔던 황건 인하대 교수가 자현스님의 두 건의 재반박 글이 보도된 이후 ‘화쟁사상 적용의 제한과 원효의 계율관’에 대한 글을 다시 보내왔다. 비슷한 시기 자현스님은 ‘화쟁을 버리고 현실에 직시하라’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한 글을 보내왔다. 두 필자 모두 ‘화쟁’과 관련한 또 다른 주장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글로 볼 수 있다. 지상논쟁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게재한다. 

[불교신문3543호/2019년12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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