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고통해결이 아닌 윤회의 시작

Q   얼마 전 유명 연예인이 연달아 극한 선택을 했다. 우리나라에 자살률은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자살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불교에서 살생은 가장 큰 악업
업보교리로 자살도 당연히 금지
동시대인 책임도 간과할 수 없어


A   대한민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으며, 전 세계적으로도 자살률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입니다. 2018년 한 해 동안 무려 1만3670명이 자살했는데 이는 하루에 37명이, 2시간마다 3명이 자살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 모두가 실제 자살사망자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하루에 자살을 시도하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의 숫자를 예측해보면 두려울 정도입니다. 만약 어떤 전염병으로 매일 40명 가까이 계속 사망하고 있다면 나라 전체가 극도의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참으로 심각한 일입니다. 이러한 자살을 불교는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 

부처님은 이 세상을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 즉 고해(苦海)로 보셨습니다. 그의 출가도 다름 아닌 이 고통에서의 벗어나는 길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사성제(四聖諦)의 시작이 바로 고성제(苦聖蹄)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방안 중 어느 곳에서도 자살은 없습니다. 자살 없이도 힘든 고통의 연속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음을 나머지 사성제에서 제시하셨습니다.

불교는 유일신을 믿는 이웃 종교들과는 자살에 대한 접근방식이 다릅니다. 유신교는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 마음대로 생명을 결정하는 것은 신의 권능에 대한 도전이므로 커다란 죄악이 됩니다. 그러나 유신교가 아닌 불교는 부처님에 대한 불경죄로 자살을 죄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는 인과응보의 ‘업보’ 교리로써 자살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고통의 해결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자신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더 깊숙이 밀어 넣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업보 중 선업(善業)은 윤회의 굴레에서 해방케 하고, 악업은 악업이 사라질 때까지 끊임없이 윤회케 합니다.

불교에서는 살생을 가장 큰 악업으로 생각하는데, 이 중에서 자신을 살생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살 후 이어지는 다음 생은 전생업의 영향이 절대적인데, 자살의 두렵고 무서운 고통이 고스란히 이어져 더욱 어려운 윤회의 생을 받게 됩니다.

부처님은 <발가리경>, <차마경>, <천타경> 등에서 ‘생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데 현실의 고통을 못 이겨 도피처로 죽음을 선택하면, 이는 고통이 끊어지기는커녕 도리어 깊어지는 윤회의 원인이 될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개인의 극단적 선택을 개인의 책임이라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불교의 인연법에서는 동시대인들의 책임(共業)도 간과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나라의 자살율이 높아질수록 우리들의 업보도 함께 늘어나는 것이니 그들을 찾아 사랑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든 자살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불교신문3543호/2019년12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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