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에세이] 석양빛에 물들다
[문인에세이] 석양빛에 물들다
  • 안혜숙 소설가
  • 승인 2019.12.11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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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떨쳐버린 삶이라면
그 삶은 분명 허상일 것이다
하긴 일출 때마다 감동하는
그 햇살이 생명의 빛이라는 걸
자주 잊고 살지 않는가

나는 다시 하늘을 봤다
일몰시간 역시 눈부신 태양은
찬란한 보석처럼 반짝이고 …
안혜숙
안혜숙

해질녘 겨울들판을 거닐다 보면 멈칫 서성거리거나 우뚝 멈출 때가 많다. 들판의 황량함과 쓸쓸함에 넋을 잃을 때도 있고, 논두렁을 온통 까맣게 물들인 까마귀 떼에 놀라 숨을 죽인 적도 있다.

오늘도 몇 차례 이름 모를 새들의 고공행진에 걸음을 멈추고 하늘 해바라기를 하다가, 뒷사람이 바짝 다가와서야 길을 비켜주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발을 뗐는데, 서너 걸음 내딛다가 우뚝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바로 앞에 까마귀의 희끄무레한 긴 그림자가 눈에 밟혔다. 한 발 한 발 겨우 내딛는 까마귀의 걸음이 위태로워 보였지만 그냥 뒤를 따르면서도 나의 한눈팔기는 여전했다. 마침 휘어진 옆길 사이로 고염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면서 나도 모르게 슬쩍 몸을 틀어 방향을 바꾸고 말았다.

감나무의 묘목에 접을 붙여야만 감나무로 성장한다는 고염나무에는 고염이 동전만한 크기로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내 손은 선 듯 열매를 따서 입 안에 넣었다. 입안에 감도는 달짝지근한 맛에 또 한 개를 따서 입안에 넣는 순간, 불현듯 어려서 아버지를 만나러 갔던 시골집 마당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 주인집 할머니가 나무에서 작은 열매를 하나 따다가 내 입에 넣어주었고, 나는 무심코 받아먹다가 입 안에 들어있는 침까지 뱉어내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 기억이 생생했다.

뜬금없이 며칠 전에 보았던 그림동화 ‘잃어버린 영혼’이라는 책에 나온 문구가 상기되었다.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보일 거예요…”라는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올가의 두 줄 글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림 일색에 글이라고는 겨우 앞에 두 줄과 중간에 한 페이지, 마지막 한 페이지에 줄거리인양 소개된 글이 전부였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로 시작되는 글은, 성공한 한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이름도 기억 못하는 상황에서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의 처방은 3년쯤 그냥 기다리란다. 이유를 묻자, 몸이 너무 빨리 달려가는 바람에 영혼이 따라잡질 못했으니, 어느 조용한 곳에 가서 영혼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내 안에도 영혼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봤었다. 혹시 ‘내 영혼도 나를 따라오지 못해 미아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얼른 고개를 흔들어버렸다. 그런데 고염 맛을 음미하면서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고염나무를 보고 내 유년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영혼 없는 세월을 살았던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유년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니… 나는 다행이다 싶은 생각에 입술까지 벙긋 벌렸다. 강화에 온지 5년이 되었으니 이 정도면 내 영혼이 찾아올 때도 되었다는 자기 합리화에 힘을 실어버린 것이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걸음을 돌려 다시 가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 길엔 여전히 까마귀가 제자리걸음으로 뒤뚱거리고 있었다. 지는 해의 역광으로 까마귀 몸은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점점 웅크려지는 검은 빛이 불그스름한 석양빛에 물들어 갔다.

그 빛은 강열했다가 금방 사라졌지만 황홀했다. ‘너무나 아름다워!’ 내 찬사의 말이 입 밖으로 새나오는 찰나, 까마귀의 뒤태가 붉게 타올라 눈을 흡떴다. 그 순간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내 머리에 박혔다.

까마귀가 쓰러졌다. 아니 스러졌던 것이다. 문득 박재삼 시였나? 암튼 그 시 구절이 가슴을 울렸다. ‘결국 우리는 해를 향하여, 해 질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나는 한동안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하늘을 봤다.

서산에는 여전히 붉은 해가 타올랐다. 아! 절로 나온 나의 탄식은 아마도 까마귀에게 보내는 헌사였던지 눈가를 적시는 눈물자국을 얼른 손등으로 훔쳐버리고, 까마귀를 손수건에 쌓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래, 죽는다. 살아있는 생명이면 모두 죽는다. 그 무엇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햇덩이처럼 가슴에 품고 사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영혼이라는 게 그 햇덩이가 아닌가도 싶었고, 영혼을 마음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을 떨쳐버린 삶이라면 그 삶은 분명 허상일 것이다.

하긴 일출 때마다 감동하는 그 햇살이 생명의 빛이라는 걸 자주 잊고 살지 않는가. 나는 다시 하늘을 봤다. 일몰의 시간 역시 눈부신 태양은 찬란한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불교신문3542호/2019년12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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