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이 끝나면 혼인을 하거라”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423년 봄, 서라벌

파종을 마친 백성들의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 덕분에 흙은 촉촉했고 땅은 비옥했다. 싹을 틔운 곡식들은 뿌리를 깊이 내리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봄바람은 따뜻했고 강가의 버드나무에는 물이 올라 산에도 들에도 푸르른 녹음이 가득했다. 궁성에 올라 논과 밭을 일구는 백성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눌지에게 미해가 말했다. 

“올해는 분명 풍년일 것입니다.”

“그렇겠지. 아니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눌지는 괴로운 듯 눈을 감으며 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생명 가득한 풍경과 달리 백성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늘진 주름이 가득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비쩍 말라 허리가 굽어 있었고, 어린아이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지난 3년 동안의 혹독한 가뭄과 흉년 때문이었다. 눌지는 눈을 감은 채 지난날을 회상했다. 복호와 미해가 서라벌로 돌아왔을 때의 기쁨이 생생했다. 비록 박제상의 희생이 안타깝긴 했으나 두 동생을 찾은 기쁨은 무엇과 비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해 왕비 아로부인이 마침내 눌지의 뒤를 이어 마립간의 자리에 오를 첫아들 자비를 낳았다. 실성이 살아있을 때, 눌지는 일부러 아로부인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거칠 것이 없었다. 회복된 금슬을 자랑하듯 이듬해에는 딸 조생공주가 태어났다. 오랜만에 궁성에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왕자와 공주의 재롱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언제나 야박했던 하늘이 비로소 눌지를 축복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창 벼 이삭이 여물어야 할 7월, 서리가 내렸다.

“계속된 가뭄으로 흉년이옵니다. 여문 이삭이 없어 수확할 것이 없다 합니다.”

“그대로 두시면 백성들이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죄다 먹어치워 산천초목이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굶주린 백성들이 자식들을 팔아넘긴다 하옵니다.”

궁성 밖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악몽이었다. 급한 대로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고자 했으나 백성 중에 빈민이 아닌 자가 없었다. 멀건 죽을 얻어먹기 위해 눈을 뒤집고 몰려오는 백성들은 측은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기근에 자식을 잃은 백성들이 혹시라도 포동포동 살이 오른 왕자와 공주를 해코지할까 두려운 마음에 아로부인은 월성 깊은 곳에 숨어 나오지 못했다. 답답한 와중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아로부인보다 먼저 딸 황아공주를 낳은 치술부인이 곁에 있다는 것이었다. 

미해의 혼인 

왕실에서 연달아 공주와 왕자가 태어난 것은 분명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눌지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흉년과 기근은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버티고 버티던 백성들은 쓰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3년째 되던 해, 풍년이 든 것이었다. 수확은 풍성했으나 함께 나눌 가족을 이미 잃어버린 백성들의 심정은 서글펐다. 서라벌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 풍년이 왔으니 아이들은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그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하는 일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 자책하거나 심려하지 마소서.”

풍년을 맞고도 맘껏 기뻐하지 못하는 눌지의 마음을 헤아린 미해가 담담하게 그를 위로했다. 눌지는 미해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수확이 끝나면 혼인을 하거라.”

“네?”

“언제까지 청아 낭자를 기다리게 할 셈이냐? 응?”

미해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궁성 안에서 미해와 청아의 사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해가 왜국에 질자로 가면서 헤어진 두 사람은 16년 가까이 떨어져 지냈으나 언제나 애틋했다. 만나지 못한 마음은 그리움이 되어 차곡차곡 쌓였고, 마침내 서라벌에서 재회하여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가슴이 울렁거렸다. 다행히 눌지의 배려로 청아는 어머니 치술부인과 함께 월성에서 지낼 수 있었고 덕분에 미해와는 매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박제상의 아내였던 치술부인은 후궁의 지위로 월성에서 지냈다. 눌지는 그녀에게 왕가의 성(姓)을 하사했다. 그래서 치술부인은 눌지와 같은 김 씨이면서 형식적으로는 눌지의 후궁이 되었다. 하시만 눌지가 치술부인을 후궁으로 삼은 진짜 이유는 박제상의 남은 가족들을 보살피기 위한 방편이었다. 임신한 몸으로 남편을 잃은 치술부인은 월성에서 딸 황아를 낳았다. 박제상의 딸이지만 눌지의 딸이기도 한 황아의 신분은 공주였다. 이제 치술부인은 왕족이자 후궁이었기에 신국의 그 누구도 박제상의 딸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미해와 청아, 치술부인과 황아공주는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가족이었다. 하지만 미해와 청아는 그 간절한 마음과 달리 혼인을 하지 못했다. 계속된 가뭄으로 언감생심 혼인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두 사람을 아껴온 눌지는 긴 가뭄이 끝나자 먼저 나서서 혼례를 언급한 것이었다. 

“긴 흉년이 끝나고 맞는 경사이니만큼 내 너의 혼례만큼은 만백성의 축복이 쏟아지게 치러주마. 내 마음이다. 또 고달픈 백성들도 마음 놓고 웃을 일이 필요하다. 그리 하게 해다오.”

“형님”

미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가뭄이 해갈되었다 하여 풍년이 든다는 보장은 없었다. 3년 동안의 기근이 앗아간 것은 백성들의 생명뿐이 아니었다. 지독한 배고픔과 사방에 널린 죽음은 백성들의 마음 밑바닥에서 버텨오던 선량함까지 부순지 오래였다. 

“화려한 혼례는 필요치 않습니다.”

“너의 뜻이 그렇다 해도 청아 낭자의 뜻은 다를 것이다. 이번만큼은 네가 양보해다오.”

단호한 표정과 달리 목소리는 부드럽고 간곡했다. 미해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구나! 참으로 좋구나!”

눌지는 미해를 보며 활짝 웃음을 지었다.
 

눌지는 미해와 청아의 혼인에 
50세 넘은 노인을 모두 초대했다 
눌지가 직접 음식까지 나눠주자 
이미 넋을 반쯤 잃은 노인들은 
황송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혼인을 이용한
민심 수습 전략이었다 

그해 가을걷이가 끝난 후
서라벌의 너른 들판에 
황금빛 벼 이삭이 출렁거리고 

백성들은 잘 익은 벼처럼 
왕실을 향해 허리를 숙여
눌지와 왕자들을 칭송했다 


청아와 보미

혼인에 대한 말을 꺼낸 후 눌지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눌지가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왕비 아로부인은 손수 미해와 청아의 혼인을 준비했다. 어린 황아공주는 예쁘게 단장한 청아를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언니, 나도 이거 입어보고 싶어.”

“나도 나도”

부쩍 옷과 장신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황아는 청아가 입고 걸친 것마다 자신도 해보겠다며 난리였다. 눌지와 아로부인의 딸 조생은 황아를 졸졸 따라다니며 혀짧은 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아로부인과 치술부인은 마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것이 딸 키우는 재미인가 싶었다. 아들만 내리 셋을 낳은 보반부인도 비단이며 장신구들을 잔뜩 가져와서 청아를 꾸며주곤 했다. 혼인 이야기가 나온 뒤 아로궁에는 오랜만에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작 청아는 늦은 나이에 혼인하는 것도 부끄러운데, 온 왕실 식구들이 나서서 요란을 떠는 것이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입덧 때문에 거동이 힘든 보미는 청아의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부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줄곧 고개를 숙인 채 그늘진 얼굴의 청아가 부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눌지와 치술부인 덕분에 월성에 얹혀살고 있긴 하지만 청아는 왕실 식구도 아니었다. 반면 보미는 비록 고구려인이긴 하지만 복호의 떳떳한 정실부인이라는 것을 방패삼아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지냈고 행여 흠이 잡힐까 복호를 제외한 모든 사람과 도도하게 거리를 두었다. 자신의 처지가 청아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며 알게 모르게 우월감을 가져왔는데, 아로부인과 보반부인까지 매달려 청아의 혼인을 축하해주는 것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샘이 났다. 

“좋겠다. 아가야, 너무 부럽지?”

보미는 뱃속에서 힘차게 발길질을 하는 아기에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런 보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복호는 눌지가 시킨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며칠 후, 미해와 청아의 혼인 날짜가 정해졌다. 마침내 혼례를 올리는 날이 되자 미해와 청아는 보반부인과 치술부인이 며칠 동안 열심히 지은 새 옷을 입었다. 사시가 되자 복호는 남당의 문을 활짝 열었다. 눌지가 미해와 청아의 혼인에 맞춰 50세가 넘은 노인들을 모두 초대한 것이었다. 눌지가 먼저 아로부인과 나란히 서서 남당에 들어섰고, 미해와 청아가 손을 맞잡고 그 뒤를 따랐다. 미해와 청아를 본 노인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눌지가 직접 음식을 나눠주자 이미 넋을 반쯤 잃은 노인들은 황송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이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 눌지와 왕비를 욕했던 것을 잊은 채 연신 고개를 숙였다. 노인들이 식사를 마치자 복호는 곡식을 나눠주었고, 미해와 청아는 예순이 넘은 노인들에게 특별히 비단을 하사했다. 노인들은 성은이 망극한 마음으로 왕실에 대한 충성의 마음을 흘러넘치도록 채운 채 집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와 손녀에게 왕실예찬을 늘어놓을 것이었다. 미해와 청아의 혼인을 이용해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던 눌지의 전략이었다. 그해 가을걷이가 끝난 후, 서라벌의 너른 들판에 황금빛 벼 이삭이 출렁거렸다. 백성들은 잘 익은 벼처럼 왕실을 향해 허리를 숙였고, 입을 모아 눌지와 왕자들을 칭송했다. 

[불교신문3542호/2019년12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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