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아기’ 파괴적 혁신인가, 인류재앙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작은 악업을 지어도 그것이 지옥으로 이끈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은) 똑같이 사소한 악업을 저질렀어도
바로 이 세상에서 감수되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느냐.”

- <앙굿따라 니까야>(A3.99) 중에서 

 

보일스님
보일스님

➲ 복제 양 ‘돌리’에서 ‘맞춤아기’까지 

당신은 아기를 필요에 따라 인위적으로 생산하는 것에 찬성하나요? 만약, 내 아이가 불치병에 걸려서 유전형질이 일치하는 다른 사람의 골수나 여타의 신체 기관을 이식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아무리 기다려도 그 적합한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다.

그런데 ‘맞춤아기’를 통한 방법이라면 내 아이를 살릴 수 있다. 자,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는 내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한 생명을 다른 생명을 위해 도구화시킨다는 윤리적 문제도 만만치 않다.

‘맞춤아기(Designer Babies)’라고 하면, 생소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미 2004년에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재된 단어이다. 신이 어린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다른 생명을 준다는 의미에서 ‘구세주 형제자매(savior sibling)’라고 하거나, ‘여분’ 또는 ‘잉여’라는 의미로 ‘스페어 아기(spare babies)’라고도 한다.

맞춤아기(Designer Babies)란 희소 질환이나 불치병에 걸린 자녀를 치료하기 위해 시험관 수정을 통해 인위적으로 아픈 자녀의 유전형질과 동일한 배아를 선택하여 ‘맟춤아기’를 낳고, 그 아기로부터 줄기세포를 얻어 아픈 자녀의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이 과정에서 착상 전 유전자 검사를 통해, 부모는 아이의 성별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체적 특징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이미 2000년경부터 영국에서는 유전질환 치료목적으로 새로운 골수가 필요한 아이에게 새로운 맞춤아기를 탄생시켜왔다. 그 ‘맞춤아기’의 골수 이식을 통해 질병을 치료한 사례도 상당수 존재한다. 이 때문에 생명윤리에 대한 찬반론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 와중에 2008년 영국의 의료윤리 감독기구인, 인간수정배아관리국(HFEA)은 ‘맞춤아기’의 출생을 공식 허용했다. 불치병에 걸린 가족, 즉 형제나 자매를 치료하기 위해 동일 유전 형질을 가진 생명을 인위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상상 가능했던 일들이 이미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지난 1997년 복제 양 ‘돌리(Dolly)’가 탄생한 이후 20여 년 만에 인간 유전자 편집기술의 개발과 더불어 인간 복제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맞춤아기’가 인류 진화의 길을 제시하는 파괴적 혁신인지, 아니면 그 자체가 인류파멸로 길로 가는 재앙이 될 것인지 변화의 파고가 매우 높다. 

➲ ‘해야 하는가?’

이 ‘맞춤아기’ 허용 논쟁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난치병 치료 목적으로 국한된 방식으로 이 기술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이 내 자식이 건강하기를 바랄 경우에는 물건을 사고팔 듯이 배아를 매매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윤리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성별은 물론 키와 피부색, 눈 색깔까지도 부모의 선호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사실상, 영화 ‘가타카’의 실사판이 되는 것이다.

이 기술로 인해 파생되는 윤리적 문제 때문에 찬반 논쟁이 뜨겁다. 이 기술의 허용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기본적으로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고 인간 윤리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탄생과 전 인격적 삶의 동기가 태생적으로 다른 생명을 유지를 위한 도구로써 시작시킬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에게 있어 원천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하는 삶이 탄생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기술이 불치병이나 난치병에 국한되어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그 치료대상으로 지정될 질병을 무엇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료 관련 단체들의 이권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정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허용을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유전질환이 대물림되는 것을 의료 기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치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에 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불치병으로 고통받는 어린 자식이 있는 가정의 가족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 질환을 평생에 걸쳐 짊어지고 가야 하는 동안 발생하는 치료비를 비롯한 의료비는 한 가정을 파산시키기에 충분하다는 점이다. 이 입장에서는 이 유전자 편집기술을 통해 대물림되는 유전질환의 악순환이 주는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벗어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유전자 편집 기술 자체의 허용 여부가 아니라 이 기술의 윤리적 균형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에 논의의 초점이 맞춰진다. 만약에 이러한 과학기술을 무작정 규제 일변도로 방향을 잡을 경우, 소위 ‘카우보이 사이언스(Cowboy Science)’가 성행하고 ‘바이오 해커(Bio Hacker)’들의 활동도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출처=www.shutterstock.com
이제 유전자 편집 기술 자체의 허용 여부가 아니라 이 기술의 윤리적 균형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에 논의의 초점이 맞춰진다. 만약에 이러한 과학기술을 무작정 규제 일변도로 방향을 잡을 경우, 소위 ‘카우보이 사이언스(Cowboy Science)’가 성행하고 ‘바이오 해커(Bio Hacker)’들의 활동도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출처=www.shutterstock.com

그런데 사실, 이 논쟁이 충분히 무르익기도 전에, 유전자 편집기술은 이미 그 자체에 대한 규제를 논할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 중국, 미국, 영국을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지난 2017년 8월에 한국과 미국의 공동 연구팀은 인간배아 돌연변이 유전자 교정에 성공했다.

이제 유전자 편집 기술 자체의 허용 여부가 아니라 이 기술의 윤리적 균형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에 논의의 초점이 맞춰진다. 만약에 이러한 과학기술을 무작정 규제 일변도로 방향을 잡을 경우, 소위 ‘카우보이 사이언스(Cowboy Science)’가 성행할 것이다.

특정 국가에서 법률로 이러한 과학실험을 금지할 경우, 허용하는 국가로 실험실을 옮기거나 심지어 공해상에서 위험한 생체실험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현 가능한 과학 기술이 영향력과 이익이 클수록 많은 과학자는 위험을 감수하는데 거리낌이 없게 된다.

‘바이오 해커(Bio Hacker)’의 등장도 이와 무관치 않다. 유전자 편집 기술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특정 국가나 제약회사들이 독점할 때 발생하는 터무니없는 치료비나 약값을 일반인들은 감당할 방법이 없다.

바이오 해커들은 제약회사나 특정 의료 이익집단의 폐해에 맞서 자신의 지하실이나 다락방에 연구실을 만들어 놓고 각종 실험을 하면서 생체 실험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대중에게 공개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들의 취지는 공감할 수 있지만, 생체실험과 관련한 정보들의 사적 이용의 위험성은 여전히 안고 있다. 

➲ ‘크리스퍼’를 통한 업의 개조?

‘업(業, Karman)이란 하나의 삶이 과거 오랜 시간 동안에 새겨진 몸과 입과 뜻이 만들어낸 경험이라는 데이터의 축적이자 미래를 만들어가는 그 데이터의 총체이다. 생명을 지속해서 유지하고 생명의 구체적 종류와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 DNA라는 일련의 정보의 흐름에 아로새겨져 있는 셈이다. 다음 생명의 탄생과 유지와 변형, 그리고 소멸마저도 이 DNA는 그 데이터를 담고 있다.

불교는 전통적으로 생명의 생성과 유지, 변화, 소멸 과정을 ’업‘으로 설명한다. 업을 통해 결과 즉 ’과보‘를 초래할 에너지(업력)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동기가 있고 의식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그 안에 이미 윤리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인과법칙이 아니라는 말이다. 현재의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이고, 미래 또한 현재 내가 짓는 업에 의해 결정된다. 이 업을 DNA와 비슷하거나 동일한 것으로 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업을 단순히 생명공학에서 파악되는 인간 염색체와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는 입장에 선다면 ’크리스퍼‘의 등장에 대해 그리 큰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DNA와 유사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상황은 좀 심각해진다.

쉽게 말하자면, 악업을 많이 지은 자가 그 과보로서 병고라는 형태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업으로 인한 과보의 구조가 DNA라는 형태를 띠고 있다면, 유전자가위 기술을 통해 제거하거나 아무리 나쁜 유전적 형질을 부여받더라도 ’맞춤아기‘ 기술을 통해 치료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우수형질의 복제도 가능해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업 이론은 그렇게 기계론적이거나 결정론적인 내용은 아니다. 업을 지은 뒤에 후속적으로 짓는 업에 따라 이미 결정된 업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경전에서 ’소금물의 비유‘로 설명한다. “수행승들이여, 한 사람이 한 줌의 소금을 발우의 적은 물 가운데 던진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행승들이여, 그 발우의 적은 물은 그 한 줌의 소금으로 짜져서 먹을 수가 없게 되지 않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 수행승들이여, 한 사람이 한 줌의 소금을 갠지스 강에 던진다고 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행승들이여, 그 갠지스 강의 물은 그 한 줌의 소금으로 짜져서 먹을 수가 없게 되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이처럼 선행하는 업을 따르는 후업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유전자편집 기술을 통한 인위적 조작을 통한 업의 개조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자신의 업을 만들어내고, 이미 행한 과오에 대해서도 참회하고 악업을 정화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인간의 미래는 결정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 따라 변화 가능한 것이다. 

➲ “‌난 되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아서 널 이기는 거야”

인간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종교와 윤리, 철학은 이 거대한 변화 속에서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맞춤아기’가 등장했고, ‘크리스퍼’ 기술을 통한 우성형질 유전자 인간의 복제가 가능해지는 미래가 다가오고 있다. 어쩌면 인공지능 로봇보다도 새로운 인류의 출현이 더 빨리 우리 현실에서 펼쳐질 수도 있다. 그 때 이르러 과연 인간은 어떤 위상으로 위치 지워지게 될까. ‘인간’이라는 종의 고유함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다시 영화 ‘가타카’로 돌아가 보자. 완벽하게 설계된 유전자를 가진 동생 안톤과 열성 유전자로 가지고 자연 잉태한 형 빈센트는 어렸을 적부터 바닷가에서 수영시합을 했다. 해안가에서 출발해서 둘 중 최대한 먼바다까지 갔다가 되돌아올 수 있는지를 내기했다. 겁먹은 사람이 먼저 중도에 포기하면 진다는 규칙이다.

결과는 의외로 동생보다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형 빈센트의 승리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둘은 똑같은 수영시합을 하지만, 그 결과도 역시 변함없이 형의 승리였다. 월등한 유전자를 가진 자신의 패배를 이해할 수 없었던 동생 안톤은 그 이유를 형 빈센트에게 묻는다. 그 물음에 대한 형 빈센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난 되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아서 널 이기는 거야.”

[불교신문3541호/2019년12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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