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참혹한 아픔 반복되지 않는 평화도량(平和道場)으로 거듭나”

한국전쟁 당시 소각된 천년고찰 안심사. 일연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후 옛모습을 되찾았다.
한국전쟁 당시 소각된 천년고찰 안심사. 일연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후 옛모습을 되찾았다.

 

1950년 10월3일 천년고찰 대둔산 안심사를 화마가 덮쳤다. 빨간 불기둥과 시커먼 연기가 하늘 높이 토해냈다. 신라 선덕여왕 7년(638) 자장율사가 창건해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도량이 힘 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어처구니 없게 아군에 의해 소각되고 만 것이다. 신라말 도선국사와 조구화상이 중창하고, 조선시대 수천화상과 신열화백이 거듭 중창한 유서 깊은 가람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1년 앞두고 찾은 안심사(주지 일연스님)는 옛날의 참혹한 상처를 씻고 여법한 수행도량으로 거듭났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휴전이후 안심사에 주석한 스님들은 피폐해진 도량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1950~60년대 국군이 방화한 역사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이같은 사실을 증언하고, 정부에서도 책임을 통감하면서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66년 8월25일 안심사가 자리한 완주군 운주면 완창리 안심부락의 주민들이 용기를 내어 증언했다. 박충원, 이동렬 씨 등 주민들이 서명 날인한 ‘징발(徵發) 사실을 입증하는 현존물적 증거’라는 문서가 그것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안심사뿐 아니라 태고사와 고운사도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기 1950년 10월 수복당시 본면(面) 적(敵)의 집거지(集據地)인 대둔산 지구를 소탕하기 위하야 대둔산내 개재(介在)한 사찰인 안심사 및, 태고사, 고운사에 제8사단 제88연대 제3대대 병력이 진주하는 중, 동년(同年) 10월3일 중대장 김삼증(金三曾) 중위 직접 괄휘하(括揮下) 작전상 상기 태고사 급(及,와) 고운사를 소각함과 동시에 본 안심사를 소각하였음. 당시 소각 명령한 대대장 이광렬(李光烈)씨와 중대장 김상증 씨 입증. 이를 목격한 산하(山下) 부락민이 현주(現住)하고 사찰은 전소(全燒) 현재 공지(空地)로 보존되고 있음을 입증함.”

이때 국군의 소각으로 안심사는 경내에 있던 30여 채의 전각과 주변의 13개 암자가 모두 사라졌다.
 

육군 제9부대장 정래혁 중장 명의의 공문. ‘작전상 불가항력의 사유’로 소각했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육군 제9부대장 정래혁 중장 명의의 공문. ‘작전상 불가항력의 사유’로 소각했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이같은 사실을 2008년 7월 보도한 본지는 한국전쟁 당시 안심사 사하촌에 살았던 김인순 할머니의 증언을 전했다. 인터뷰 당시 72세였던 할머니는 “절이 소각되던 날 오후 7~8시경에 하늘 끝까지 솟는 불길을 30리 밖에서도 생생하게 보였다”면서 “3일간이나 불길이 계속됐다”고 증언했다.

이어 “2~3년 뒤에 안심사를 갔는데, 잿더미만 남고 새카맣게 타버린 공양미가 법당 자리에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면서 “당시 어른들이 절이 불에 탄 것을 보고 울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안타까운 순간을 전했다.

안심사는 조선 선조 8년(1575)에 제작된 653판(板) 한글경판을 소장하고 있었다. 일부 유출된 경판이 유통되고 있지만 대다수는 한국전쟁 당시 소각되고 말았다. 1931년 7월9일자 동아일보에는 ‘300여 년 전 소각(所刻) 한글대역불경판(對譯佛經板, 언해본불경판) 전부(全部) 5종 653판 전주 안심사서 발견’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안심사에서 한글로 된 불경판의 가장 완비한 것을 발견했다는 내용이다.

동아일보는 “지금까지에 한글로 된 불교서적은 월인천강곡(月印千江曲) 네 권이 락질(落帙)이 만흔대로(많은대로) 발견된 것이 잇다(있다)”면서 △원각경 573판 △금강경 45판 △은중경 13판 △천자(千字) 9판 △류합(類合) 14판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한글 경판을 보관하던 판전(版殿)이 없어져, 불당 뒤 마루밑에 보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만해 한용운 스님이 극찬한 국보급 경판들이 한국전쟁으로 사라진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같은 날 동아일보에 실린 한용운 스님 인터뷰 전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원각, 금강, 은중의 한글역본은 전부터도 잇는 것입니다마는, 그 경판이 어대 잇는지는 몰랏든 것이 이번에 다행으로 발견되엇습니다. 전주 안심사는 지금은 퇴락하야 누구하나 차자주는 사람도 업는 적은절입니다. 우리는 이 귀중한 보물을 사정이 허하는대로 서울에 전각을 짓고 옴기어 보관할 필요가 잇다고 생각합니다. 한글로 된 경판으로는 최고 완비한 것임으로 불교측은 물론 한글연구가에도 큰 자료가 되겟는 이 국보를 그대로 두어서야 되겟습니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외침에도 유실되지 않았던 안심사 한글경판이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한국전쟁이 끝난 후 김창수 스님이 안심사 소각 사실을 증명하고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박기준 운주면장이 이같은 내용에 대한 확인원(願)을 증명하는 서류를 발급했다. 1966년 10월 5일자의 이 확인원(증명)에 따르면 대웅전(2층 63평), 명부전(25평), 적설루(2층 25평), 향적전(32평), 약사암(32평), 칠성각(8평)이 1950년 수복당시 군작전상 소각되어 건물대장에 등록되지 않은 사실을 증명했다.

주민들이 증언한 시기에 안심사 주지로 있던 김창수(金昌洙) 스님은 이같은 사실을 근거로 ‘미확인 징발재산 신고서’를 국방부 장관에게 제출했다. 이 자료에는 징발 연월일, 징발사용 부대명, 징발집행관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에대해 국방부는 1967년 4월 ‘육군 제9부대장 중장 정래혁’ 명의로 “최종 심사결과 작전상 불가항력의 사유로 불인정 되었다”고 회신했다.

비록 서류를 반송했지만 국군의 소각을 사실상 인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앞서 김창수 스님은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경산스님에게 이같은 상황을 보고하고, 총무원장 스님으로부터 “상기 사찰에 대한 일체 사유재산의 별지 목록과 여(如)히 군 작전상 명령에 의거 소각 되었음을 확인함”이라는 내용의 확인증을 발급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안심사의 소각 관련 잘를 살펴보고 있는 주지 일연스님.
한국전쟁 당시 안심사의 소각 관련 잘를 살펴보고 있는 주지 일연스님.

이밖에도 안심사 주지 일연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안심사의 소실 사유를 증명하는 자료를 다수 보관하고 있다. △김창수 스님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200자 원고지 6매 분량의 건의문(초고) △마을 주민이 증언한 ‘안심사 실화 현황 표시 자료’ △육군 제9부대장 박경원 중장이 조계종 총무원장 경산스님 앞으로 보낸 ‘미확인 징발재산 신고서 반려’ △소실된 불상 및 부속재산명세서 등이 그것이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백분 이해하더라도 천년고찰을 세 곳이나 방화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심사가 지금의 여법한 도량으로 재탄생 한 것은 2002년 일연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다. 일연스님은 숱한 난관을 딛고, 가람 재건의 원력을 성취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15년 11월 목조건축사업비 40억 원(설계비 포함), 단청사업비 12억 원 등 52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대웅보전의 옛 모습을 다시 찾았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법당으로 1층은 53평(173㎡), 2층은 34평(112㎡) 규모다.

안심사 주지 일연 스님은 “안타깝게도 국군에 의해 사라진 안심사 대웅보전을 복원한 것은 사부대중과 더불어 주민들에게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면서 “대웅보전을 완공한 후 도량을 정비하여 부처님 가르침과 문화재의 소중함을 후대에 전하는 도량으로 장엄하기 위해 정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연스님은 “내년에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하는 만큼, 참혹한 전쟁의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평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면서 “후인들에게 이러한 교훈을 바르게 전달해 모든 이들이 ‘편안한 마음(安心)’을 지닌 정토가 구현되도록 수행하고 정진하겠다”고 발원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안심사를 참배하고 한글경판을 확인한 사실을 보도한 1931년 7월 9일자 동아일보.
만해 한용운 스님이 안심사를 참배하고 한글경판을 확인한 사실을 보도한 1931년 7월 9일자 동아일보.
1931년 7월 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안심사 경판. ‘새로 발견된 경판의 일부’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1931년 7월 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안심사 경판. ‘새로 발견된 경판의 일부’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 안심사 불사 발원문

시방삼세 제불보살님 관세음보살님께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원하옵니다. 이곳 대둔산 안심사는 자장율사께서 부처님 치아사리와 진신사리를 안장한 이후 대대로 가람수호를 하여오면서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의 언해본 한글장경을 보유하였던 국보사찰이었으며, 근세에는 백곡처능(白谷處能, 1617~1680)과 같은 호불사상인이 당시 배불정책을 썻던 조정에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라는 상소문을 당당하게 제시하였던 가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웅장장했던 가람이 6·25 한국전쟁으로 아군에 의해서 불타 버린 후 안심사의 성보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토담집으로 연명하다가 1980년대에 비구니 현응스님의 원력으로 적광전과 요사를 세우게 되었고, 그 후 대대로 가람을 수호하던 주지스님들이 예전의 이층 대웅보전을 복원하려고 온갖 노력을 하여왔습니다. 그러나 이곳 안심사는 지역적으로 교통이 불편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탓으로 복원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제 비구니 일연이 안심사 주지로 부임하여 이와같은 현실을 실로 가슴 아프게 여기고 부처님 전에 두손 모으고 제불보살님과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으로 이 불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원만하게 성취되도록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합니다.

부처님. 안심사 대중스님들과 신도 그리고 안심사를 참배하는 모든 이들이 이 불사에 한마음으로 동참하려는 마음이 일어나게 하소서. 운주면민과 완준군민과 전라북도민들이 한마음으로 불사를 돕게 하소서.

그리하여 민족전쟁으로 희생된 안심사가 국민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게 하소서. 그리고 불사를 이루기 위해 신심있는 대중이 모여들고 경전읽고 마음공부하면서 수행하는 도량이 되게 하소서. 따라서 이 불사의 인연공덕으로 국운이 융창하고 국민이 화합하여 잘사는 나라 평화로운 나라가 되기를 기원드립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보리의 회향이 안심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불기 2548년(2004) 7월11일 안심사 주지 일연 삼가 발원합니다.

완주=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