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생모 숙빈 최씨 기도 들어준 천년고찰

부모 잃고 고아된 최복순
용흥사에서 간절한 기도
꿈에서 본 귀인 만나 입궐

산이름 바꾸고 왕실서 보호
진우스님 부임 후 가람 일신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현몽한 뒤 고아에서 왕비로 신분이 상승한 이야기가 서린 담양 용흥사 전경.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현몽한 뒤 고아에서 왕비로 신분이 상승한 이야기가 서린 담양 용흥사 전경.

전남 담양 용흥사(龍興寺)는 제18교구본사 백양사(白羊寺) 말사다. 백양사에서 담양읍으로 가는 중간 계곡으로 들어가면 나온다. 백제에 불교를 전했던 간다라 지역의 승려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천년고찰이다. 원래 이름은 용구사(龍龜寺)였다. 용구사라는 절 이름의 내력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마라난타 창건설 

고봉 기대승이 지은 면앙정기(仰亭記)에 이르기를 “당(堂)의 주봉(主峰)을 ‘제월(霽月)’이라 하는데, 산세가 동에서 구불구불 똬리를 틀며 제월에 이르러 우뚝 솟아 용처럼 낚아채고 범처럼 할퀴며 서쪽으로 몇 리를 달려 툭 튀어나와 뭉친 것이 무릇 일곱 굽이이다. 굽이의 가장 높은 곳에 정(亭)이 있어 날아갈 듯한데 ‘면앙(仰)’이라 한다. 정(亭)에 올라 바라보면 기암괴석이 꼭대기에 나란히 서있고, 아래에 석불사(石佛寺)가 있어 종경 소리를 정(亭)에 미치는 것은 용귀산(龍龜山)이요. 검극(劍戟)이 삐쭉 용귀산(龍龜山)과 나란히 서서 바로 정(亭)과 얼굴을 마주한 것은 몽선산(夢仙山)이요….”

용처럼 생겼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에 용과 관련된 이름이 유달리 많다. 용구사라는 이름도 산 이름에서 따왔다. 어쩌면 용구사가 먼저 있었는지 모른다. 

제월봉이라는 이름도 눈길을 끈다. 비가 갠 뒤의 달이란 뜻을 가진 제월(霽月)은 수행을 통해 ‘본래의 깨끗한 성품’을 회복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구름에 가려 달이 가려진 것처럼 본래 성품은 밝고 깨끗하나 번뇌에 시달려 그 면목을 잊고 있다 끝없는 수행으로 본래 면목을 회복한다는 불교의 핵심사상이다.

사찰 누각에 ‘제월루’가 많은 까닭이다. 선비들도 그 이름을 아꼈으니 양산보는 면앙정 근처에 소쇄원을 짓고 맨 꼭대기 사랑채를 제월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용흥사 극락교 옆에 조성된 부도군.
용흥사 극락교 옆에 조성된 부도군.

용 모양 닮은 용구산 

왕조의 변천에 따라서 산 이름은 또 바뀐다. 태조 이성계가 국태민안과 등극을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삼인산(三人山)을 찾으라는 성몽(聖夢) 때문에 제를 올리고 임금으로 등극한 뒤 몽성산(夢聖山)이라고도 불렸다. 굳이 수백년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 없이 같은 시대, 한 고을에 사는데도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용구산은 담양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고 그 옆 장성은 왕벽산(王璧山)이라고 부른다. 제월봉이라는 이름도 간 곳 없고 다른 이름이 붙었다. 오랫동안 산세는 똑같은데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이름을 지었다 지웠다 한다. 본면목은 그대로인데 바뀌는 형상이 주인인 줄 알고 섬기는 꼴이다. 

용구산을 등지고 면앙정은 너른 들과 강을 내려다 보고 서 있으며 용흥사는 계곡을 끼고 깊숙이 들어간다. 아예 속세를 떠나 심심유곡으로 들어가는 탈속의 가람과 부(富)와 권력에 기대는 세속의 유유자적은 이처럼 다른지 모른다. 

가을이 완전히 저문 11월 말의 용흥사는 아직 따뜻했다. 절로 들어가는 계곡이 일품이다. 계곡을 막아 만든 호수에는 아직 단풍이 한창이고 물결에 반짝이는 햇살은 눈부시다. 일주문 앞 극락교 옆에 용흥사에 주석했던 스님들의 부도가 나란히 서있다. 모두 7기다. 청심 일옥 송백 황여 퇴암 황여 퇴암스님의 부도에 이름 없는 부도 2기다.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월해당(越海堂)일옥(一玉)이라는 이름이 눈길을 끈다. 일옥은 진묵대사 이름이다. 김제를 중심으로 전란으로 지친 중생을 어루만지고 함께 했던, 화신불로 추앙받는 진묵대사인가? 주지 진우스님(조계종 교육원장)은 “진묵스님이 아닌 다른 분”이라고 한다.  

용흥사는 대가람으로 많은 성보를 간직했었다. 석가모니불 좌상, 자씨미륵보살 입상, 제화갈라보살 입상, 아미타불 좌상 등 50여 점에 달했는데 일제가 약탈하고 전쟁으로 소실됐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책사였던 일본인 혜경스님이 용흥사 성보를 다수 수탈해 갔다고 한다. 
 

용흥사 들어가는 길.
용흥사 들어가는 길.

1991년 일본 히로시마 안국사(혜경 스님 사찰) 마루 밑에서 삼장시왕탱이 발견됐는데, 용흥사 혜적암에서 조성된 것으로 판명됐다. 용구산에는 7암자에다 많은 고승이 주석하며 50여년간 불법(佛法)을 폈던 호남 제일 가람이었다. 많은 부도는 그 자취다. 

왼쪽으로 난 찻길 대신 이끼가 잔뜩 낀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서서히 용흥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산 모양을 따라 놓은 다리라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드러나는 풍경이 달라진다.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나무다. 가지를 사방으로 벌린 오래된 보호수가 먼 길을 달려온 낯선 이를 반갑게 맞는 듯 하다. 평일인데도 차가 많다. 용구루(龍龜樓)에 마련된 찻집에서 차와 가을을 즐기려는 사람들 때문이다. 절 밖으로 내걸린 이름은 용구루, 대웅전을 바라보고는 보제루(普濟樓)다. 

대웅전 안에 보물이 있다. 보물 제1555호로 지정된 용흥사 동종(銅鐘)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를 활기 넘치는 네 마리의 용 머리로 만든 특이한 형태다. 조선 인조 대인 17세기 중반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한 장인 김용암이 만들었다.

종에는 용구산 용흥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아마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복원하면서 용흥사로 이름을 바꾼 듯 하다. 산 이름도 바뀐다. 조선 후대 임금 영조의 생모가 이 절에서 기도를 하고 신분이 상승한 뒤 그 은혜를 갚는다며 당우를 더 세우고 산이름도 바꾸었다. 

그녀의 이름은 최복순(崔福順). 담양 창평 마을이 친정이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는데 온 가족이 장티푸스에 걸려 부모를 잃고 동네에서 쫓겨나 용구산의 한 암자에서 살게 되었다. 매일 기도하는데 어느 날 “네 효심과 불심이 지극하여 좋은 길을 안내할 터인 즉, 내일 장성 갈재에 가면 귀인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꿈을 꾼다. 최복순은 이 말을 듣고 갈재에서 후일 숙종의 비 인현왕후가 되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난다.
 

보물로 지정된 동종.
보물로 지정된 동종.

최복순의 간절한 기도 

최복순을 궁으로 데려간 인연을 더 구체적으로 다룬 이야기도 있다. 1936년 편찬한 ‘정읍군지’에 의하면 숙빈 최씨는 정읍현 태인면 출신으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랐다.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태인의 대각교에서 거지 차림의 복순을 발견하고 민유중의 부인 송씨가 불쌍히 여겨 데려다 키웠다. 그리하여 인현왕후가 왕비로 간택되어 입궁할 때 대동했다고 한다. 정읍군은 몇해 전 복순과 송씨 부인이 만났다는 자리에 푯말을 세웠다.

‘영조실록’은 최씨가 현재 서울 세종로 일대인 여경방 서학동에서 태어났으며 부친은 해주 최씨 최효원이고 외조부는 홍계남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영조가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평생 콤플렉스에 시달린 것을 고려하면 믿을 기록이 못된다. 

궁으로 들어간 이후의 최씨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과 남인의 당쟁에 휘말려 비에서 쫓겨나는 고통을 겪고 왕후가 데려왔던 최씨 역시 부침을 함께 한다. 

그러다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고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영인군 금(昑)으로 훗날 임금에 오르는 영조다. 부모 잃고 고아로 전전하던 최복순은 궁의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로 신분 상승한 뒤 다시 숙빈의 지위에까지 오르는 봉건 왕조 시대 여성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용흥사 일주문.
용흥사 일주문.

숙빈이 왕의 승은을 입고 왕자의 어머니가 된 뒤 용흥사도 번창을 누린다. 용흥사는 최복순이 숙종의 승은을 입은 후 ‘몽성산 용흥사(夢聖山 龍興寺)’로 바뀐다. 1871년에 간행된 ‘호남읍지’의 창평현 사찰조(寺刹條)에는 ‘용흥사는 용구산에 자리하며 궁(宮)의 원당(願堂)으로 종이를 만드는 임무를 담당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영조가 즉위 한 후에는 여섯 명의 상궁을 모실 육상궁이 들어서고 사찰에 일체의 세금을 면세했다. 

조선 말 왕실의 비호를 받는 용흥사는 왕조가 기울자 호남의병의 근거지로 일제에 저항하다 48동의 가람이 일본군에 의해 불탄다. 이를 모정선사가 1930년부터 10여년에 걸쳐 11동을 복원했으나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다시 전소됐다.

임시 법당과 요사채만 있던 사찰은 현 주지 진우스님이 2000년 주지 소임을 맡은 뒤 20여년에 걸친 불사로 가람을 일신했다. 폐허와 다름없는 가람에 축대를 쌓고 대웅전, 중화당, 회성당, 미타전, 적묵당, 보제루 등을 잇따라 건립했다. 몽성선원을 열어 10여명의 수좌들이 안거를 났으며 얼마 전에는 고불총림 백양사의 고불율원이 이 곳으로 왔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5주 째에 비바람이 거세게 불자 용이 세존의 몸을 일곱겹으로 감고 머리를 덮어 비바람을 막았다. 불교는 이처럼 뛰어난 수행자를 용(龍)으로 상징하니 선원에서 정진하는 수좌들 명단을 용상방(龍象榜)이라 부르는 연유다. ‘용구산’ ‘용흥사’ 용이 두 번 겹쳤으니 그만큼 많은 수행자가 이 산과 골짜기에서 정진하고 독경소리가 끊이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듯 하다.
 

용흥사 가는 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호수.
용흥사 가는 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호수.

담양=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40호/2019년12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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