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논쟁] 원효스님의 화쟁, 이상인가 현실인가

자현스님

1980년대 볼거리가 많지 않았던 때만 해도 미스코리아대회는 제법 인기 있는 프로였다. 미소 냉전체제가 존재하던 시절, ‘()’이 되는 분들은 세계평화를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말을 힘주어 하곤 했다. 좋은 말이고 타당한 말이며, 무척 바람직한 말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공허한 메아리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실천을 담보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인 천명일 뿐이기 때문이다.

원효의 화쟁 역시 올바른 모범답안일 수 있다. 그러나 모범답안은 언제나 이상적이며, 이상만으로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즉 괴리의 발생인 셈이다.

화쟁을 쉽게 설명해보자. 지구상에는 거대한 대륙에서부터 아주 작은 섬에 이르기까지 무수하고 다양한 대지의 군상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표면상으로는 분리돼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바다 밑에서 본다면, 모든 육지는 동일한 기반 위에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하나일 뿐이다. 즉 현상적인 차이와 대립의 너머에 본질적인 지구라는 완전성의 코드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에 대한 생각을 한다고 해서, 현상적인 차이가 무력화될 수 있을까? <장자> ‘소요유에는 현실적인 논리학자 혜시가 장자를 풍자하며 크기는 한데 쓸모는 없다는 비판을 한다. 그러자 장자는 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서 노닐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무하유지향이란 불교의 깨달음과 유사한 장자의 이상향이다. 즉 논리적 층위를 달리해서, 논점을 현실이 아닌 이상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 장자 역시 현실적인 해법은 없었던 셈이다. 화쟁의 논리 모순도 이와 비슷하다. 때문에 이치적으로는 맞지만, 현실적으로는 언제나 뚜렷하지 않고 답답할 따름이다.

치열한 현실정치나 세계적인 기업들이 펼치는 사활을 건 치킨게임에서, 화쟁의 논리가 얼마나 작동할 수 있을까? 이것은 그저 깨침에 덧씌워진 허울 좋은 방어기제일 뿐이다.

법상종에서는 이불성(理佛性)과 행불성(行佛性)의 두 가지 불성을 말한다. 본질에서는 같지만 현상적으로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현실을 도외시한 채 유심 주의에 입각해서 무턱대고 현실과 본질을 일체화시키면, 원효처럼 이율배반적인 비윤리의 광기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원효가 보여주는 일탈과 걸림 없는 모습이 멋있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삶의 태도는 결코 한 사회나 단체의 기준이나 사표가 될 수 없다.

서구를 압도하던 동아시아가 몰락하며 서구의 문화적인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명료한 현실판단이 결여된 두루뭉술한 화쟁적 사고어쭙잖은 유심 주의가 시너지를 일으킨 결과이다. 다종교가 경쟁하는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제1 덕목은 깨침보다도 윤리다. 깨침이라 하더라도 윤리를 넘어서면 내로남불의 위험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를 현대인은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또 사회의 기본 윤리조차 포함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정당한 깨달음이란 말인가? 부처님께서는 위없는 깨침을 얻으신 분인 동시에, 올바른 윤리적 삶을 사신 분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불교 안에 존재하는 원효의 망령은 반드시 걷어내져야만 한다.

불교의 기준은 언제나 부처님이다. 관세음보살이 아미타불을 정대하듯, 우리 삶의 좌표 역시 오직 부처님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원효의 광기는 한국불교를 휘감고 있는 짙은 안개이며, 화쟁 역시 현실성을 상실한 범범한 이상(理想)의 외침에 불과하다. 철저한 분석을 거치지 않은 화쟁은 무기력이며, 발전을 잃게 만드는 악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먼저 치열하게 분석하라! 화쟁은 그다음에 논의되어도 전혀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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