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일수록 다투지 않는 미덕 넓혀가야 화합한다”

애증 버릴 때 고락 성쇠 없고
중생苦 담는 헌신적 자아 양성

“중생 마음은 지도자가 볼 때
자기를 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다스리는 쪽 사람일수록
하루 한 번 씩 이 거울을 통해
자기 마음을 반영해 봐야지요”

조계종 전 종정 월하스님

불교신문 1987년 1월 28일자 신춘탐방 / 대담: 주필 정휴스님 

- 새해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리고 안거 중에 찾아뵙게 되어 정진하시는데 지장이 안 되는지 죄송스럽습니다. 1987년은 종단도 이제 중흥의 발판을 마련해야 하고 국가적으로는 많은 변화와 시련과 진통이 예상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지도자의 위치에 계신 분들의 예지와 경륜이 필요합니다. 방장 스님께서 밝은 시대를 열어 가는데 종도와 국민이 어떠한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하는지 한 말씀 해주시지요. 

“밖에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겨울인데도 오늘은 봄날 같습니다. 영축산 정상에 머물러 있는 봄의 섭리가 하산하고 있는가 봅니다. 겨울은 사계 중에서 안거를 하는 계절이지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자연도 진통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한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치러야 하는 산고(産苦)같은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우주의 섭리입니다. 

종단도 그동안 숱한 고난과 진통을 체험했으니 그 경험을 토대로 중흥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안정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있으나 무엇보다 우리 종도가 해야 할 일은 지도자를 모셨으면 일을 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 주어야 하고 종도 자신들이 종단을 위해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스스로 협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동안 종단은 제도가 나빠서 혼란이 야기된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와 종도가 일치단결을 하지 않아 분규가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의화동열(意和同悅) 이화동균(利和同均)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서로가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기 삶을 관리해야지요.” 

- 올해로 불교정화를 한지 3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구조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특히 그동안 사람을 키우는데 심혈을 쏟지 않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오늘의 사원은 우리민족의 정신사를 창조해 온 곳입니다. 그리고 초범성성(超凡成聖)을 이루게 하는 선불장(選佛場)이 아닙니까. 특히 불교교육은 일반적 교육과 달리 이 시대 중생을 교화해야 할 인천(人天)의 사표(師表)가 되게끔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나무를 길러 수확을 얻으려면 10년 이상은 걸려야 하는데 하물며 이 시대의 사표를 육성하려면 교육의 혁명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기르는데 보다 많은 투자도 있어야 하고 종단자체가 수행하는 분위기로 만들어야 하고 사찰을 책임 맡고 있는 분들의 원력이 뒤따를 때 한국불교 장래는 밝아질 수가 있습니다.” 

- 현금 종단은 제도적으로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지만 현실을 보면 분화(分化)되어 있습니다. 불교가 현실 깊숙이 참여하여 중생의 고통을 증언하고 대비를 실천하려면 수행과 교화를 제도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판과 사판은 정화이전에 잠깐 구분되어 있던 제도입니다만 이 제도를 현실 속에 제도화 해버리면 많은 무리가 야기될 것입니다. 첫째 수행인은 공사정신(公私精神)을 갖고 자기가 체험한 오도적 삶을 중생에게 회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사를 모두 체달(體達)하여 원융(圓融)의 미덕을 쌓아야 합니다. 정각 자체에 세간과 출세간이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히 수행인은 이사무애(理事無碍)의 삶을 철저히 깨달을 때 만법과 더불어 걸림 없는 주인공으로 새로이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 견성(見性)은 수행인이 체득해야 할 목적입니다. 스님께서 수행하신 지혜와 경험을 통한 입장에서 견성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한말씀 하십시오. 

“견성이란 글자그대로 성품을 본다는 의미인데 성품을 본다면 자성이 또하나 있는 결과가 됩니다. 왜냐하면 보려고 하는 주체는 누구이고 보여지는 객체는 누구입니까? 그래서 육조 스님은 ‘그대 안에 자기불(自己佛)이 있나니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고 하였고 자성이 참으로 광활해서 만성(萬性)을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자성은 본래 진(眞)도 아니고 망(妄)도 아닙니다. 그리고 바로 자성이 만성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성을 체험(體驗)하는 일입니다. 관념적 견성은 올바른 깨침이 아닙니다. 부처님도 이 자성을 보고 발견한 분입니다. 

자성이란 본래 그대로 있을 뿐 누가 창조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진리의 구현체라고 하였으며 옛 조사들은 본자연비조작(本自然非造作)이라 했지요. 그리고 영안전정(永安傳)선사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처의 자비와 도움에 의존하지 않으며 삼계(三界)의 어디에도 살지 않으며 또 오온(五蘊)에 속하지 않으며 조사도 감히 나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며 이름까지도 불리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가 가르쳐 줄 수 있느냐’고 물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위진인이 날마다 중생의 면전을 출입하고 있음을 잘 살펴야지요.” 
 

불교신문 1987년 1월28일자 ‘신춘탐방-영축총림 월하 방장을 찾아서’ 기사.
불교신문 1987년 1월28일자 ‘신춘탐방-영축총림 월하 방장을 찾아서’ 기사.

- 요즈음 각계 지도자들과 정치인들 사이에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야 마음을 비워야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은 모양이지요. 불교의 무소유란 따지고 보면 우주를 모두 소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법계의 질서는 평등합니다. 여기에 친소(親疎)가 개입되니까 평등이 깨지고 소외계층이 생깁니다. 먼저 마음을 비우기 전에 마음속에 있는 애증부터 버려야 합니다. 진실로 애증을 버리면 고락의 성쇠(盛衰)가 없는 법을 체득할 것입니다.

역사적 인과는 어느 시대이고 있습니다. 지도자일수록 마음속에 사람을 사랑하는 덕성을 길러야 하고 밖으로 다투지 않는 미덕을 넓혀가야만 국민이 화합할 수 있습니다. 정치란 것을 잘은 모르지만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절하면서 비록 더디지만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가는 기술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타협이 있어야 하고 타협이란 양극화된 것을 풀어서 서로의 의식과 감정이 만나 단결하는 정신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는 이런 양극화된 현상을 화합시키는 중간 계층의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비판하는데 있어 사람을 자극시키고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부드러움이 강을 제압하듯이 애어(愛語)로 사람을 깨우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비판하는 쪽에 있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이고 미덕입니다. 

또 하나, 투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쟁취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점수(漸修)의 걸음걸이로 이 사회의 어둠을 제거해야만 잃는 것이 적습니다. 중생의 마음(民心)이란 지도자 쪽에서 볼 때 자기를 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다스리는 쪽에 있는 사람일수록 하루 한 번 씩 이 거울을 통해 자기마음을 반영해 봐야지요.” 

- 방장 스님께서 자동차운전을 배웠다고 해서 상당히 화제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자신의 주인공을 몰고 다니는 운전사 아닙니까. 그래서 운전을 한 번 배워 보았습니다. 운전을 해 본 사람은 다 경험을 해보았겠지만 자동차의 속도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차는 급하게 몰수록 사고가 나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도 평등의 질서를 잃고 급하게 서둘다보면 사고를 일으키게 됩니다. 부처님이 사람의 마음을 원숭이에게 비유한 일이 있습니다. 그만큼 하루에도 수천수만의 번뇌를 일으킨다는 의미이지요. 바로 이 산란심(散亂心)을 관리하는 주인공이 자기 마음입니다. 그리고 절에서 쫓겨나면 운전이나 하고 살아야지요, 하하하 …” 

- 스님께서 생활하시면서 혹시 입멸(入滅)이란 것을 생각해보셨습니까? 

“생사거래(生死去來)는 중생이 할 일이지, 자성자체에 생사는 존재치 않아요. 그리고 한번도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되도록 우주의 섭리에 거역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 같이 우주법계에는 생명의 기운이 충만해 있음을 깨닫고 있을 뿐입니다. 질문하고 다른 이야기나 마지막으로 해야겠는데 어느 시대이고 변화란 것은 있어요. 그런데 이 변화를 혼란으로 단정하면서 그것을 위험시하는 사상은 진정한 안전을 유지할 능력이 없음을 자각해야 될 것이고 변화 또한 우리의 국익과 체질에 맞게 애용하는 지혜를 지도자가 가졌으면 합니다. 참선을 하는 데도 인정이 개입되면 안 되듯이 증애(憎愛)가 깊으면 도를 이룰 수 없습니다.” 

- 스님 육근(六根) 육진(六塵)을 여의고 법이 있습니까? 

“육식(六識)이 모두 그대의 집안 식구들인걸.” 
 

노천(老天) 월하스님은…
1915년 태어나 1933년 18세에 강원도 유점사에서 차성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 득도했다. 1950년부터 1980년까지는 불보종찰 통도사 전계대화상으로 후학양성에 힘썼다. 1950년대부터 종단 일에 매진한 스님은 1955년 중앙종회의원, 1956년 통도사 주지, 1958년 조계종 총무부장 권한대행, 1958년 조계종 감찰원장, 1960년 중앙종회 의장직을 수행했다. 1970년부터는 조실로 통도사에 주석하며 1975년 동국학원 재단이사장, 1979년 조계종 총무원장, 1980년 종정 직무대행 등을 역임했으며 1984년 영축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1994년 개혁회의 의장을 역임하고 제9대 종정으로 취임했다. 2001년 다시 영축총림 방장으로 재추대되어 통도사에 주석하다가 2003년 12월4일(음력 11월11일) 통도사 정변전에서 입적했다. 세수 89세, 법랍 71년. 

정리=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3539호/2019년11월30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