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 교수, 김선아 감독 반박문에 대한 재반박

본지 3532(2019116일자) 수미산정에 게재된 중앙승가대 교수 자현스님의 화쟁, 정확한 관점과 분석이 우선이다글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겁다.

자현스님의 글에 대해 황건 인하대 교수(본지 논설위원)원효대사는 몸소 대중을 교화한 실천가라는 반박문을 본지에 보내온데 이어 김선아 다큐멘터리 감독(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내가 보는 원효-무애 그리고 화쟁이라는 원고를 보내왔다. 인터넷에서도 이에 대한 찬반 입장 표명으로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자현스님은 황건 교수와 김선아 감독의 반박문에 대한 입장을 담아 지난 1126원효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라라는 제목의 재반박문을 본지에 보내왔다. 자현스님은 원효의 학문적인 업적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면서 원효는 자신도 승려가 아니라고 했고 불교의 어떤 기준으로도 승려일 수 없는 분이라고 피력했다.

이어 스님은 한국불교는 원효를 성사(聖師)’라 부르며 사표로 삼고 있다스스로 탈퇴한 분을 억지로 재출가시켜 상징 인물을 삼는 것은 그 어떤 종교전통에도 없는 무지의 작태이며, 이런 분이 사표가 되는 상황이니 한국불교는 계율적으로는 도저히 맑아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래는 자현스님의 재반박문 전문이다.

원효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라

자현스님
자현스님

내가 원효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울산대 철학과 수업에서 원효의 한마음과 지눌의 참마음이라는 학부 전공을 가르치면서다. 제목을 쉽게 풀어 놨기 때문이지, 본 내용은 원효의 일심(一心)과 지눌의 진심(眞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 였다.

당시 나는 불현듯 수업과 관계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 두 분이 나란히 병칭되는 것이 타당할까? 학문적으로야 충분히 가능하지만, 이들의 삶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원효가 수도인 경주에서 자발적인 파계와 <무애가>를 통해 속()을 관통하고자 했다면, 지눌은 땅 끝 수선사(송광사)에서 치열한 수행 결사로 승단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분이다.

중국 화엄학에서는 이통현과 청량징관의 삶이 대비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통현은 활달하여 걸림 없는 막행막식의 삶을 살았는데, 징관은 깎아지른 벼랑처럼 엄격하고 위엄있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화엄을 공부했으면, 통현 같아야지 징관 같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곤 했다. 즉 통현의 예술가적인 삶의 태도가 징관의 칸트 같은 방식보다 우월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송나라 때 혜홍은 <임간록>에서 통현이 출가했다면, 징관처럼 되었을 수도 있다는 논평을 했다. 즉 출가와 재가는 행동 양식에서 결코 같을 수 없다는 말이다.

원효는 속퇴하기 전에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허락할 것인가?”라는 음험한 말을 공공연히 소리치고 다녔다. ‘도끼 자국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며, 도끼에 자루가 박히는 것 역시 성적인 의미이다. 오늘날 교양인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막말을 통해 원효는 계획적으로 요석궁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설총을 낳은 뒤에야 비로소 속인의 옷으로 갈아입고 스스로를 소성(小姓)거사라 칭했다. 원효하면 떠오르는 무애행도 사실은 이렇게 속퇴한 뒤의 일일 뿐이다.

원효의 학문적인 업적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원효는 자신도 승려가 아니라고 했고, 불교의 어떤 기준으로도 승려일 수 없는 분이다. 즉 두 가지를 나눠서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원효를 성사(聖師)’라 부르며 사표로 삼고 있다. 스스로 탈퇴한 분을 억지로 재출가시켜 상징 인물을 삼는 것은 그 어떤 종교전통에도 없는 무지의 작태이다.

또 이런 분이 사표가 되는 상황이니, 한국불교는 계율적으로는 도저히 맑아질 수 없다. 섞은 물이 맨 위에 있으니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이 아니겠는가!

원효와 동시대를 산 의상에게는 스님을 끔찍이도 사모한 선묘가 있었다. 그러나 의상은 귀국 시 선묘에게도 알리지 않고 배를 탔으며, 실의에 잠긴 선묘는 끝내 바다로 투신하고 만다. 여성에 대해 상반된 행동을 한 두 분 중 출가인이라면 누구를 사표로 삼아야 할 것인가? 부처님이 제정한 기준을 넘어서는 분을 성사로 모시는 한국불교에 과연 희망이 고일 수 있을까?

만해는 항일에 투철한 분이지만, 그럼에도 세 차례나 총독부에 한국 스님들도 일본 승려들처럼 결혼하게 해 달라는 건의서를 보낸 사람이다. 그 행실이 앞은 위대하지만, 뒤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무엇으로 비난하는가? 부처님의 정신으로 이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긍정하는가? 학문적인 위대성과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긍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끊어보는 것이 옳은 관점이다. 이들은 부처님의 정법(正法)회상에서는 그 어떤 미사여구의 수식과 합리화로도 영원히 내쳐지는 분들임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다.

불교는 원효가 아닌 부처님을 따르는 종교이다. 이런 점에서 바다가 더러운 시체를 뭍으로 밀어내듯원효는 승단에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위인(爲人)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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