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오신 부처님] <33>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만나리- 박제상③
[사랑으로 오신 부처님] <33>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만나리- 박제상③
  • 조민기 글 견동한 삽화
  • 승인 2019.11.2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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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국의 개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소”

탈출

시녀는 난처한 얼굴로 박제상과 미해를 보았다. 며칠 사이 박제상을 따라 배를 타며 시달리느라 핏기 없는 미해의 얼굴이 안쓰러웠다. 

“좀 봐주시게나.” 

박제상이 은근한 목소리로 시녀에게 말했다. 시녀는 왜왕을 모시는 궁녀에게서 박제상의 이야기를 들었다. 믿었던 왕에게 아내를 빼앗기고 반역이라는 누명까지 쓴 채 이곳에 왔다고 했다. 아내가 얼마나 미인이기에 신국의 왕이 탐을 냈는지 궁금했다. 억울하게 역적이 되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스카까지 온 박제상. 그 박제상이 일개 시녀에 불과한 자신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미해 왕자는 질자이나 십 수 년 넘게 그림자처럼 지내왔다. 하루쯤 늦잠 잔 것을 못 본 척해준다고 해서 무슨 일이 있겠는가. 잠시 고민하던 시녀는 알았다는 눈짓을 하고는 물러갔다. 시녀가 물러간 것을 확인한 박제상은 서둘러 미해와 함께 포구로 달려갔다. 일각이라도 지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서 가십시오.” 

숨을 몰아쉬며 박제상은 근처 섬에 숨어 있다가 시간에 맞춰 포구에 온 신국의 배에 미해를 태웠다. 

“제상” 

박제상을 바라보는 미해의 얼굴에 슬픔과 고통 그리고 만 가지 근심이 서려 있었다. 미해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며 박제상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저 진심을 받았으니 신국의 신하로 죽는다 한들 후회는 없으리라.’ 

“제상, 자신을 잘 지켜야 해. 이번에는 내가 그대를 데리러 올 것이야. 그때까지 꼭 자신을 잘 지키고 있어야 해.” 

미해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점점 아득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박제상은 눈물을 닦으며 미소를 지었다. 미해가 떠났으니 아마도 살아서 신국의 땅을 다시 밟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미해의 처소에 돌아왔다. 다행히 시녀들은 한 식경이 지나도록 아무 기척이 없었다. 

박제상

날은 따뜻하고 화창했으며 바람도 순풍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반나절이 지났으니 미해가 탄 배는 지금쯤 무사히 신국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었다. 미해를 찾는 시녀를 몇 차례 물렸으나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 되자 시녀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왜왕이 직접 박제상과 미해를 찾는다고 했다.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침상 위에 앉아 있던 박제상은 일선에서 아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서라벌에 가게 되면 다시 신국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신국을 떠나면 아마 돌아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상황이 오거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십시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몇 번을 외우고 나자 머리가 개운한 것이 두려움과 초조함이 사라졌다. 박제상은 염주를 손에 쥔 채 방문을 열었다. 

“미해 왕자는 아직 주무시는 것입니까?” 

“가자꾸나.” 

박제상은 시녀의 질문을 못 들은 척 태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왜왕에게 갔다. 

“혼자 온 것을 보니 미해 왕자는 오늘도 멀미가 심했나 보군. 요 며칠 그대가 해준 음식이 입에 맞았는지 술 한 잔을 하려니 그대 솜씨가 떠오르더군. 오늘은 어떤 고기를 잡아 왔는가?” 

“오늘은 고기를 잡으러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잡힌 고기를 놓아주었습니다.” 

“고기를 잡지 않았다면서 잡힌 고기를 놓아주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알아듣게 말하라.” 

“미해 왕자님을 신국에 보내드렸습니다.” 

“뭐라? 네가 기어이 나를 속이고 미해를 빼돌렸다는 말이로구나. 어째서 그랬느냐?” 

“미해 왕자를 돌려 보내달라고 청한들 보내주셨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결정할 일이다. 그대에겐 미해를 보내달라 부탁할 권리도, 신국으로 보낼 권리도 없다. 그대는 분명히 그대의 입으로 나의 신하가 되겠다고 했다. 그 말도 모두 거짓이었느냐?” 

“그렇습니다.” 

태연자약한 박제상의 대답에 왜왕의 이마에서 핏줄이 솟았다. 

“하! 눌지는 지금 그대의 아내에게 왕성(王姓)인 ‘김씨’ 성을 하사하고 그녀를 비첩으로 삼았다. 알고 있느냐?” 

박제상의 얼굴이 굳어졌다. 왕족의 신분으로 월성에서 살게 되었으니 아내와 딸은 무사할 것이며 그가 없어도 잘 살아갈 것이었다. 눌지의 배려에 눈물이 났다. 박제상이 억울해서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한 왜왕은 순간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대는 이미 나를 배신했으나 그대가 한 약조는 아직 유효하다. 그대의 말처럼 눌지는 이미 그대를 버렸고 신국에 돌아간다 해도 아내를 되찾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 진정으로 나의 신하가 된다면 미해를 빼돌린 죄를 모두 용서하마.” 

왜왕의 말에 신하들이 술렁거렸다. 질자를 빼돌린 것만 해도 충분히 죽을죄였다. 그런데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박제상을 신하로 삼겠다는 것이 아닌가. 

“결정하라. 신국에서 배신당하고 여기서도 죄인으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나의 신하가 되겠는가? 나의 신하가 된다면 장차 신국에 복수를 할 수도 있다. 어떤가?” 

박제상은 왜왕의 얼굴을 보며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신국의 충신으로 죽겠습니다.” 

왜왕과 신하들의 표정에 충격이 어렸다. 영원 같은 찰나의 침묵이 대전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왜왕이 입을 열었다. 

“저자를 죽여라.”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미해를 탈출시킨 박제상은
살 기회를 주겠다는
왜왕의 제안을 거절하고
신국의 충신으로 죽겠다고
거듭 답한다 

“세상에는 고난을 함께하는 
군신이 있고, 부귀영화를 
함께 누리는 군신이 있소
부귀영화를 누리기는 쉬우나 
고난을 함께 겪는 인연은
만나기 어렵소” 


다음 생이 있다면 

불어오는 바람에 박제상의 산발한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온몸은 상처투성이였고 맨발에서는 피가 흘렀다. 만신창이가 된 몸과 달리 박제상의 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이 시간을 기다려온 듯, 달가운 죽음을 맞는 사람 같았다. 

“다시 묻겠다. 신국을 버리겠느냐?” 

박제상이 끌려가는 동안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던 왜왕은 결국 형장까지 와서 박제상과 눈을 맞추고 물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강함과 약함이 있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권력이 있다.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게 고개를 숙이고, 임금이라 해도 강한 권력을 쥔 신하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힘을 키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 자락의 힘이라도 갖기 위해서라면 속고 속이고, 질자를 주고받고, 간자를 심어 약점을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박제상과 눌지의 관계는 달랐다. 눌지는 박제상에게 권력을 준 적이 없었다. 땅과 노비를 준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박제상은 눌지에게 충성을 바쳤고 마침내 목숨까지 내놓으려고 하고 있었다. 눌지의 무엇이 박제상을 움직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었다. 저 충심이 눌지가 아닌 나를 향한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왜왕은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박제상이 퉁퉁 붓고 찢겨서 반쯤 감겨있던 눈을 간신히 뜨고 왜왕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신국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소.”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아프게 쳤다. 

“어째서냐?” 

왜왕은 더 구겨질 것도 없는 자존심을 간신히 움켜쥔 채 다시 물었다. “눌지는 그대를 버렸다. 그대가 죽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국의 신하로 죽겠다니 그대의 목숨은 하나가 아니라 열 개쯤 된단 말인가? 신국의 무엇이 그대의 마음을 쥐고 있단 말이냐?” 

“왕께서는 모를 것이오.” 

“내가 무엇을 모른단 말이냐?” 

박제상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왜왕은 박제상의 입술에 귀를 가져다 댔다. 

“말하라.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이냐? 도대체 무엇 때문에 돌아갈 나라도, 받아줄 왕도 없는 하찮은 그대의 마음 따위도 얻을 수가 없단 말이냐?” 

박제상은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는 고난을 함께하는 군신이 있고, 부귀영화를 함께 누리는 군신이 있소. 부귀영화를 함께 누리기는 쉬우나 고난을 함께 겪는 인연은 만나기 어렵소. 등을 돌리는 것은 쉬우나 마음을 지키는 것은 어렵소. 당신은 늘 쉬운 길을 택하는 이들과 손을 잡았으나 나는 당신의 손을 잡지 않을 것이오. 나는 고난을 함께한 태자 전하의 신하로 남을 것이오. 그래야 떳떳하게 눈을 감을 수 있기 때문이오. 나는 신국의 신하로 죽을 수 있어서 마음이 편안하오.”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왜왕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왜왕이 손을 떨구자 박제상의 목 위로 잘 벼려진 칼이 날아왔다. 순간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도는 아내를 향해 속삭였다.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얼굴이 주름으로 가득할 때까지 그대와 함께하리다.” 

박제상의 마음을 닮은 붉고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불교신문3538호/2019년11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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