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아적 삶 산게 전부? … 원효는 치열하게 보살행 실천했다”
“반항아적 삶 산게 전부? … 원효는 치열하게 보살행 실천했다”
  • 김선아 다큐멘터리 감독 · 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
  • 승인 2019.11.22 10:1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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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내가 보는 원효 - 무애 그리고 화쟁

화쟁이란 말에 메여 있는 것은 현대인이 갖고 있는 한계일뿐
'무애가'는 치열한 실천행 표본…걸림없는 삶 살며 보살행 펼쳐
김선아
김선아

일체유심조.’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다. 이는 내가 마음먹은 대로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라는 필터를 통해서만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란 존재가 가진 경험과 지식, 사고력과 감각의 한계라는 수많은 필터를 통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받아들이고, 또 한계투성이인 언어를 매개로 표현하게 된다.

일체유심조란 말에 사로잡히면 서로 해석이 틀렸니 맞았니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우리 인지체계의 현상을 살펴보면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일반인조차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네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진리가 앎에서 머무를 때, 진리는 효용가치를 갖지 못한다. 앎이 깨우침으로 전환이 되었을 때, 그 진리는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게 된다.

원효는 일체유심조란 말로 그 진리를 펼쳐보였다. 같은 방식으로 화쟁이란 진리를 펼쳤다. 쟁론을 화합하는 방법으로 언어에 머물지 말고 근본을 들여다볼 것, 각자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근거에 귀 기울일 것, 그리고 적어도 불교적 쟁론에 있어서는 모든 주장을 관통하는 하나의 목소리, 바로 부처님의 궁극적 목소리를 찾을 것을 제시했다. 그러면 당연히 화합의 길이 열리게 마련이다.

이는 주장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이 지금도 논리적 주장의 기본문법으로 활용되고 있듯이 원효의 화쟁론도 현대의 많은 갈등해결의 장에서 활용되고 있고, 활용될 수 있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론이다. ‘화쟁이란 말에 메여 그것이 제시하는 유용한 화합의 기술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가진 한계이지 원효의 한계가 아니다.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은 얼마 전 불교신문에 실린 화쟁에 대한 논설을 읽고 마음이 영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 논설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원효 스스로는 무엇을 했는가? <무애가>를 부르며 시대의 반항아적인 삶을 산 것이 전부이지 않은가? 즉 원효의 화쟁 주장에는 치열한 실천과 성공은 없었던 것이다.”

1400년 전 태어나 이 땅에서 한 평생을 살고 간 원효. 그의 삶을 바라보는 눈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되새기게 되는 지점이다. 나는 원효의 <무애가>를 치열한 실천행으로 본다. 원효는 글을 읽는 학자들을 위해 이미 엄청난 저술을 남겼다. 하지만 당시의 대다수 민중들은 문자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통일신라란 말이 통합과 안정, 평화의 상징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전쟁의 실상을 아는 이들은 삼국전쟁으로 지난한 고통을 받다가 졸지에 나라마저 잃은 고구려와 백제 난민들의 절망과 아픔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원효는 붓을 꺽고 민중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언어로 그들을 위로하고 돌보고 희망을 주기 위해.

무애행. 걸림 없는 삶. 이는 대 자유를 온전히 만끽하며 사는 삶이다. 진정한 자유의 기본 조건은 무엇인가? ‘를 온전히 아는 것이다. 나를 온전히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와 나를 둘러싼 현상과의 관계를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다. 그 관계의 파악이 일체유심조고 그래서 자유로워진 사람만이 나를 넘어서 남과 하나되는 진정한 보살행을 펼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원효의 무애행에 대해 알게 되었을때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나의 이민생활을 접고, 17년이나 떠나 있었던 한국으로 돌아오게 할 만큼의 감동이었다. 고등학생때부터 심취해있던 서양철학자들에게선 보지 못했던 참다운 실천행을 원효의 <무애행>에서 발견하고, 그 발견을 알리기 위해 그의 행적을 찾아 다니며 몸과 마음으로 학습한 지 어느 새 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원효에게서 삶의 지표와 가르침을 찾아 실천하며 사는 많은 이들을 만났다. 한국의 스님들과 학자들뿐 아니라, 동남아, 서양의 학자들, 목사님까지. 참으로 값진 시간이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을 송두리째 바꾸는 경험이었다. 내년에는 그 동안 기록한 장편다큐도 완성하고, 보다 많은 세상의 대중들과 원효의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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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df1234 2019-11-22 18:58:32
쓰신 글에 십분 동감하오며
보살이요 대선지식인 원효대사께 예경올립니다.

...아 슬프도다 후학이 불초하여
관규여측管窺蠡測 - 대롱구멍만한 소견으로 
감히 하늘을 측량하려는구나!

언급하신 일체유심조의 원리대로,
자기 마음에 따라 성현도 망령처럼 보이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