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넘는 기대, 뜻밖의 수확
헛된 마음에 붙이는 속담이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으니
하찮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천대 속에 꽃 핀
한글과 고려가요를 보시라

고운기
고운기

우리 문명사에 이런 획기적인 발명이 없건만, 한글은 창제 이후 마땅한 쓰임새를 찾지 못하였다. 시비가 끊이지 않은 까닭이다. 정작 제작 담당 기관인 집현전의 총관리자조차 반대하지 않았는가. <월인석보> 같은 불교 경전의 번역에 한글을 처음 써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경전의 번역이라는데 감히 딴지걸지 못하리라 본 것이다.

그렇게 명맥을 유지하던 한글이 제대로 쓰인 경우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노래를 적는 일이었다. ‘악장가사’ 같은 악보집이었다. 이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고려가요는 신라의 향가를 이어받아 조선의 시조나 가사로 이어준, 우리 문학사에서 허리 같은 존재이다. 노래의 전통을 잃지 않았고, 독특한 개성을 갖추었다. 고려가요의 의의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노래가 마땅한 표기 수단도 없으면서 한 시대의 역할을 했다. 이것은 기적이다. 신라에는 향찰이, 조선에는 한글이 있었지만, 고려가요는 구전(口傳)이 기록을 대신한 것이다.

고려가요를 가리키는 용어 가운데 속요는 본디 민간에서 불리던 노래(민요)를 나라에서 발굴하여 궁중 연회의 가창곡(속요)으로 썼기에 붙여졌다. 이런 노래는 고려 때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전반까지 궁중에서 불렸고, 심지어 19세기까지도 가창의 흔적을 남겼다. 구전할 구실은 분명했다. 다만 당대의 기준으로 고려가요는 고급스러운 노래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속된 노래였다.

그래서 한 가지 추정해 보는 것이다. 고려가요는 천한 노래이며, 그런 노래를 한글로 적는 일이라면 굳이 시비 걸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배경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천한 한글이 천한 일에나 쓰인다는데 말이다. 하지만 고려가요는 매우 강한 개성을 지닌 노래이다. 강한 개성이란 시대적 배경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사회적인 혼란, 전쟁 같은 일대 사건이 노래로 불려 시대를 증언한다는 점이 쉽게 확인된다. 그것이 때로는 처참한 상황 그대로, 때로는 반어적으로 묘사되었을 뿐이다. 노래가 지닌 이같은 의미와 역할은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다. 노래는 언제나 시대적 격랑을 반영하여 나타난다. 고려가요는 유독 이같은 노래의 속성이 두드러진다. 

나아가 순수한 서정의 영역 또한 고려가요는 놓치지 않았다. “어름 위에 댓닢자리 보아/ 님과 내가 얼어 죽을망정/ 정(情) 둔 오늘 밤 더디 새오시라”(이상곡, 履霜曲)는 다소 자극적인 표현 때문에, 그런 일련의 노래에 휘둘려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의 하나라 평가되지만, 지독한 사랑의 노래요 고려 사람이 지닌 정열의 소산이었다.

신라보다는 문화적 체계가 잘 잡히고, 조선 같은 강압적 유교 이데올로기가 덜한 시대의 사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노래란 어떤 분위기에서 어떻게 불리는지 가만히 일러주는 지남(指南)이다. 

이 지점에서 결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한글이 만난 고려가요, 고려가요가 만난 한글이다.

창제 이후 불교 경전의 번역으로 겨우 살아남았는데, 한글이 천한 것에 속하는 노래를 적는 일에서나 정처를 찾았다면, 지금의 관점으로는 한글이 적실하게 쓰인 이만한 예를 찾기 어렵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고려가요를 천하게 여긴 것은 한글로서는 도리어 다행한 일이었다. 

‘밤나무에서 은행 열리기 바란다’는 속담이 있다. 주제 넘는 기대, 뜻밖의 수확을 바라는 헛된 마음에 붙이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때는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으니 하찮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천대 속에 꽃 핀 한글과 고려가요를 보라. 

[불교신문3536호/2019년11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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