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화풍 한반도 거쳐 동아시아 끝에서 화현

高 담징스님 그렸다 전해져
1949년 화재로 소실 후 복원
인도 굽타 中초당 양식 반영
중앙亞 채색법 등 영향 보여

고구려 비롯 삼국 장인 참여
법륭사 창건에 ‘고려척’ 사용
벽화 금문은 신라 비단 모방
일본 미술 발전 한반도 영향

고구려 담징스님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호류지 금당의 관음보살.
고구려 담징스님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호류지 금당의 관음보살.

일본 나라(奈良)에 가면 꼭 들러야 하는 사찰이 있다. 바로 호류지(法隆寺)이다. 호류지를 들러봐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한, 두가지를 꼽으라 하면 백제관음과 금당벽화가 아닐까 싶다. 백제관음이야 이름에서도 한반도와의 관계를 읽을 수 있지만 금당벽화는 왜일까. 

호류지 금당의 내부 벽에 그려진 벽화는 고구려 출신 화가로 610년 일본에 건너가 채색과 종이, 먹, 연자방아 등의 제작법을 전수한 담징(曇徵, 579〜631)이 그렸다고 전해온다.

이 벽화는 1949년 화재로 인해 내진(內陣) 위쪽 소벽에 그려진 비천상과 천개만 남기고 모두 전소되었으나, 다행스럽게도 화재 이전 금당 벽화를 모사한 것이 남아 있어 화공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현재는 불에 탄 금당의 자재와 불에 그슬린 벽화가 화재 당시의 모습 그대로 수장고 안에 보존되어 원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호류지 금당의 석가정토도.
호류지 금당의 석가정토도.

호류지 금당은 남쪽으로 정문이 있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인데, 내부에는 석가 삼존불과 약사불, 미륵불 및 목조 신장상들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문이 나 있는 남쪽을 제외한 동벽과 서벽, 북벽에 사방불 벽화를 비롯하여 문수보살·보현보살·성관음보살·십일면관음보살·관음보살·대세지보살·반가사유보살 벽화, 수미단의 내진(內陣) 20개의 작은 벽면에는 각각 비천도가 배치되어, 마치 12벽화가 불법을 수호하고 중앙 수미단을 외호하는 듯 하다. 

금당 벽화의 배치와 존명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전해온다. 1106년의 『칠대사일기(七大寺日記)』에는 “서쪽벽은 아미타정토화이며 주존은 반장육(半丈六)이다. 동쪽벽은 약사정토변으로 중존도 역시 같은 크기이다. 남북의 벽은 각각 불보살의 그림이 있는데.... 안작도리(鞍作止利)의 필체가 있다”고 하여 동, 서벽의 그림에 대해 각각 약사정토도와 아미타정토도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238년의 <성덕태자전사기(聖德太子私記)>에는 “금당의 내벽에 사불의 정토변이 그려져 있는데 … 4벽 중 서벽은 아미타정토, 동벽은 보생정토, 북벽은 석가정토이며 북벽 동측은 약사정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 법륭사를 창건한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법상종(法相宗) 신앙과 관련하여 금당 중앙의 수미단을 세우고 사방벽에 미륵과 석가불, 약사와 아미타여래의 시간적, 공간적 개념의 주존불을 봉안하였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법화경>에 의거하여 석가, 아미타, 약사, 미륵정토변의 회화를 사방으로 도상화하여 수미단을 외호하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방벽의 그림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고후쿠지(興福寺) 5중탑 1층에 그려진 서방정토도에 대해 기록한 <흥복사류기(興福寺流記)>의 내용에 근거하여, 동벽에 석가정토, 서벽에 아미타정토, 북벽 서측에 미륵정토, 북벽 동측에 약사정토를 그린 것이라는 설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사방의 정토도는 중앙의 화려한 천개(天蓋) 아래 부처가 앉아 있고 좌우에 협시보살이 본존을 향해 서 있으며, 나머지 여백에는 화불이 표현되었다. 각각 솜씨가 달라 여러 화가들이 서로 분담하여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호류지 금당의 아미타정토도.
호류지 금당의 아미타정토도.

그중 서벽에 그려진 아미타불정토도는 가장 뛰어난 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화려한 보개 아래 전법륜인(轉法輪印)을 결하고 결가부좌한 아미타불은 균형 잡힌 신체에 양감이 풍부한 둥근 얼굴, 얇은 통견(通肩)의 법의, 음영이 표현된 옷 주름 등에서 인도 굽타 및 중국 초당 시기의 불상 양식이 잘 반영되었다. 

이러한 점은 협시보살에서도 볼 수 있다. 본존을 향해 배를 약간 내밀고 서있는 보살들의 유연한 삼곡자세(三曲姿勢)는 인도 굽타 시대 불보살상을 보는 듯하다. 또한 갈색과 녹색, 황색 등을 주조로 한 중앙아시아적 채색법과 철선묘(鐵線描) 위주의 묘법에서는 고구려 벽화의 영향도 보이고 있어, 고구려의 담징이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전하는 것처럼 삼국시대 회화와의 관련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석가정토도는 시무외, 여원인의 설법인을 취하고 결가부좌한 석가모니 옆에 약합과 여의당(如意幢)을 든 두 보살과 십대제자가 석가여래를 외호하고 있는데, 이것은 <법화경> 23품 ‘약왕품’과 27품 ‘묘장엄왕본사품’에서 약왕보살과 약상보살의 공덕으로 병으로부터 구제받고 성문의 깨달음을 통해 부처의 지혜를 얻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본다.

7세기 돈황벽화에서도 57굴과 220굴 등에서 비슷한 작례를 살펴볼 수 있다. 북벽 서측의 미륵정토도는 의좌상의 부처가 보살과 제자, 신장상 등과 함께 묘사되었으며, 북벽 동측의 약사정토도 역시 일광보살, 월광보살과 제자, 신장상 등이 여래를 외호하고 있다. 북측 벽화에 대해서는 동측을 미륵정토, 서측을 약사정토로 보기도 한다. 

철저한 대칭 구도에 늘씬한 8등신 체구, 양감 있는 얼굴과 신체, 배를 앞으로 내민 삼곡 자세, 6-7세기에 유행했던 요철화법을 사용한 적극적인 음영법이 사용된 옷자락 표현 등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양식을 보여주는 금당의 벽화는 인도 굽타 시대의 불상 양식에 영향을 받은 실크로드 및 중국 당,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고구려 등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벽화를 소장하고 있는 호류지 금당.
고구려 등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벽화를 소장하고 있는 호류지 금당.

특히 아미타정토도의 관음보살은 인도 아잔타석굴 제1굴의 연화수보살의 우아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철선묘법으로 세밀하고 완성미 높은 양식으로 그려진 이 벽화는 담징이 활동했던 연대보다 다소 늦은 시기로 보긴 하지만, 법륭사 창건 당시 ‘고려척’을 사용하였고, 삼국의 장인들이 금당 창건 시 참여한 점, 백가(白加), 가서일(加西溢) 등 삼국의 화가들이 일본에서 활동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을 보더라도 금당벽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사람은 한반도의 화가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양식이 실크로드를 통해 직접 유입된 화풍인지 혹은 삼국의 화승들에 의해 완성된 작품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인도 화풍이 동아시아 끝에서 나타나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금당 벽화는 천무년간(673〜686)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설과 지통연간(687〜696)에 이루어졌다는 설, 707〜734년에 제작되었다는 설 등 여러 학설이 있으나 호류지 5중탑 벽화의 발견으로 5중탑 벽화가 완성된 711년보다는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벽화의 금문(錦文)에 대한 연구를 통해 금당 벽화에 묘사된 금문은 천무년간(673〜685), 지통년간(686〜696)에 신라로부터 가져온 비단을 모방하여 670〜690년 사이에 관영공방에서 짠 위금(緯錦)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로 인해 금당 벽화는 당으로부터 비단을 수입하기 시작한 704년 이전에 제작되었으며, 금당 벽화에는 신라의 영향이 나타난다는 것이 학설이 제기되었다. 호류지 금당 벽화는 담징이 직접 그리지는 않았다고 해도 적어도 한반도와 관련이 있으며, 벽화의 양식은 초당(初唐) 양식을 받은 삼국시대 불화 양식과의 친연성이 깊다고 할 수 있다. 

담징 뿐 아니라 많은 화가들이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을 했다. 백가는 588년에 승려 6명, 사공(寺工) 2명, 철반공(鐵盤工) 1명, 와박사(瓦博士) 4명과 함께 일본으로 갔는데, 당시 일본에서 아스카데라(飛鳥寺)가 건립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아 사찰에 불화를 그리기 위해 초청된 불교 회화 전문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아스카데라에는 고구려와 백제 승려들이 머물렀으며 그 절의 건축 양식이 ‘백제양’(百濟樣)이라고 불렸던 점에서 미뤄볼 때, 백제 기술자들이 사찰 건립에 대거 참여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백가는 사찰에 그림을 그렸을 뿐 아니라 노반명(露盤銘)에도 이름이 남아있어, 당시 화공의 역할이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백가가 그린 작품은 남아있지 않지만, 삼국시대 일본 미술의 발전에 한반도의 미술이 영향을 미쳤음을 말해준다. 

검게 그을린 금당벽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 옛날 일찍이 대륙을 넘어 돈황과 실크로드로 구법의 길을 떠나 벽화를 참관하고 돌아와 벽화를 그렸을 화가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어른거린다. 
 

1994년 화재로 검게 그슬린 호류지 금당 내부 모습.
1994년 화재로 검게 그슬린 호류지 금당 내부 모습.

[불교신문3536호/2019년11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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