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눌지 태자께서는 마립간이 되자 곧바로 저를 고구려에 보내셨습니다. 마립간이 바뀐 것을 고하라는 이유였으나 사실 고구려에 계신 복호 왕자를 데려오라는 뜻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습니다. 고구려에 가기 전, 마립간께서는 제게 이번이 마지막이다, 돌아오면 그대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주겠다 몇 번이나 약조하셨습니다. 저는 그 약조를 믿었기에 복호 왕자를 꼭 데려오겠다고 다짐하면서 엄동설한에 고구려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복호 왕자님을 무사히 서라벌에 모셔왔습니다.”

박제상의 말은 한 치의 거짓이나 과장이 없었다. 모두 사실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중요했다. 박제상은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그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자 답답해진 왜왕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마립간께서 저의 부인과 사통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대전에서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왜왕과 신하들은 박제상의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립간께서 절 부르셨을 때 알았습니다.”

“무엇을 말인가? 마립간이 그대에게 직접 이야기하던가? 부인과 사통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속사포처럼 묻는 왜왕을 향해 박제상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니라, 고구려에서 막 돌아온 저에게 이번에는 실직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실직? 실직은 신국과 고구려가 국경을 대고 있는 지역 아닌가?”

바다 건너 작은 나라에서 신국에 대해 아는 것도 많구나 싶어 박제상은 화가 났다. 다행히 왜왕과 신하들은 박제상이 괴로움을 참느라 얼굴이 일그러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실직은 신국의 가장 변방입니다. 그곳으로 저를 보내려는 이유는 단 하나, 사통에 방해가 되니 눈앞에서 치워버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을 속이려고 눌지를 모함하는 거짓을 말하려니 몸이 떨려왔다. 왜왕은 박제상에게 점점 믿음이 갔다. 

“미인을 마음 놓고 품자니 충신이 눈에 거슬렸겠군.”

왜왕의 혼잣말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눌지가 마립간이 되자마자 박제상의 부인을 탐하는 인간이었다니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마립간께서는 제게 삽량주에 들리지 말고 곧장 실직으로 가라고 명했습니다. 그리 하겠다고 대답했으나 부인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부인과 오붓하게 지내겠다 싶었는데 얼굴도 보지 못하고 떠나려니 억울했습니다.”

박제상의 목소리가 어찌나 비통하던지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래서 왕성에서 가장 빠른 말을 골라 타고 일단 서라벌을 빠져나갔습니다. 잠시 삽량주에 들러 부인의 얼굴만 보고 실직으로 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삽량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안 마립간께서 저에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대전에서는 탄식이 터졌고 박제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명령을 거역하고, 마립간의 말을 훔쳤다며 반역죄를 선언했습니다. 반역자가 되었으니 저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 뿐, 신국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억울해서 그렇게 죽을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율포에 도착하자마자 배를 탄 것입니다.”

힘겨운 이야기를 마친 박제상은 왜왕 앞에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신 박제상, 앞으로는 신국과 마립간이 아닌 왜국의 신하가 될 것이니 부디 받아주십시오.”
 

다음날 오후 박제상은 양손에 
커다란 물고기를 들고 돌아왔고 
미해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처소에 오자마자 쓰러졌다 

옷엔 토한 얼룩이 남아있었고 
입에서는 역한 냄새가 진동 

환심을 사기 위해 미해왕자를
일부러 고생시킨 박제상은 
손수 요리한 물고기를 
왜왕에게 바치고 그 다음날…


낚시

박제상의 고백은 왜왕과 신하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눌지를 배신한 이유가 다름 아닌 치정 문제였다니 너나 할 것 없이 그럴 만도 하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인들은 박제상을 동정했고 남자들은 박제상의 아내 얼굴을 궁금해 했다. 얼마나 미인이기에 저 충신을 역도로 둔갑시켰단 말인가. 마음이 약해진 왜왕은 박제상을 후하게 대접했다. 미해가 질자로 있는 동안 거의 초대한 적이 없던 왕족연회에도 초대했다. 초대에 응한 박제상은 전혀 미해를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자신을 버린 마립간의 동생에게는 이제 관심도 없다는 것인가?’

왜왕은 연신 술을 마시는 박제상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왕께 아뢰옵니다.”

한참 술을 마시던 박제상이 갑자기 왜왕 앞에 엎드리며 말했다. 

“말하라.”

왜왕이 웃으며 답했다. 

“술은 달고 향기로운데 함께 먹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사옵니다. 만약 허락해주신다면, 신이 내일 바다에서 고기를 낚아 요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오! 재주도 많군. 생선요리도 할 줄 아는가?”

“아내가 좋아하던 음식입니다.”

박제상의 눈이 아득해졌다. 왕비와 후궁들, 시녀들까지 덩달아 탄식하며 가슴에 손을 대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온 왕궁 안에서 박제상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왜왕은 딱하다는 얼굴로 박제상을 보며 시종에게 명했다. 

“그리 하라. 내일 아침 일찍 배와 낚싯대를 준비하라 일러두지.”

“그리고 혹…”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하라.”

“허락하신다면 낚시할 때 미해 왕자도 데려갈까 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낚시하면서 도움을 받을까 합니다.”

“미해의 도움을 받는다?”

왜왕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는 뱃멀미가 심하네. 익히 알고 있을 텐데, 무슨 도움을 받는단 말인가?”

“그러니 더더욱 함께 가고 싶습니다.”

“호호, 제 생각이 맞다면 그대는 미해 왕자를 괴롭히실 생각이군요. 아닙니까?”

후궁 여인 중 하나가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했다. 

“제 말이 맞나 봅니다. 호호호”

여인이 교태가 듬뿍 담긴 눈으로 왜왕을 보며 말하자 왜왕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라. 너무 괴롭히진 마시게나.”

“괴롭히다니 당치 않습니다. 다만…”

“또 무엇인가?”

“내일 신과 미해 왕자가 낚시할 때 다른 사람은 없었으면 합니다.”

“어머나? 여차하면 왕자님을 바다에 빠뜨리기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그건 곤란합니다. 호호”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부정하는 박제상의 눈이 웃고 있었다. 

“하긴,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 그리 하게나.”

다음 날, 박제상이 미해를 데리고 새벽같이 낚시를 하러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왜왕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 오후 박제상은 양손에 커다란 물고기를 들고 돌아왔고 미해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처소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졌다. 미해의 옷에는 토한 얼룩이 남아있었고, 입에서는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박제상은 손수 요리한 물고기를 왜왕에게 바쳤다. 담백하면서도 짭짤한 맛이 일품이었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박제상은 미해를 데리고 낚시를 하려 다녔다. 셋째 날, 배에서 내릴 때 미해는 모래밭에 얼굴을 묻으며 쓰러졌고 박제상은 맑은 생선탕을 올렸다. 박제상이 끓인 생선탕이 유난히 입에 잘 맞았던 왜왕은 그날 평소보다 조금 많은 술을 마셨고 다음 날 늦잠을 잤다. 

탈출

“일어나십시오, 왕자님. 늦으면 안 됩니다. 물고기가 움직이는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오늘만 쉬면 안 될까? 정말 너무 힘들어서 그래.”

미해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요 며칠 새벽부터 낚시를 가는 박제상과 미해 왕자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 시녀는 하품하다가 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안이 조용해졌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던 차에 방문이 열렸다.

“왕자님께서 오늘은 쉬신다고 하시는데, 아무래도 억지로 데려가야 할 듯싶네. 나중에 왕자께서 병이라도 나신다면 시중을 드는 자네가 꾸중을 듣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오늘은 늦잠을 잤다고 하고 들어가서 더 쉬게나. 그러면 내가 새벽에 왕자를 억지로 데리고 낚시를 하러 가는 것을 못 본 것이 되지 않나?”

[불교신문3536호/2019년11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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