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불교신문은 나의 도반 - 원택스님


백련암에선 화두 드는 것 외
글도 TV도 볼 수 없게 ‘엄명’
해인사 총무 때 외부와 소통

성철스님 종정 재임 기간
종단안팎 사정 알기 위해
불교신문 가까이 하게 돼

스님이 법어실린 신문 찾으면
오자 없는지 먼저 살펴보고

주2회 발행 결정했을 때는
감당해낼지 걱정 앞섰는데
이젠 심층기획 많아졌으면 …

원택스님은 ‘성철스님 시봉이야기’로도 유명하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 또한 그에 못지않다. 스님은 불교신문과의 인연이야기를 위한 인터뷰 요청에 가까운 곳에서 차나 한 잔 하면서 자격이 되는지 판단해 보라며 신문사와 가까운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사무실에 자리를 마련했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원택스님은 ‘성철스님 시봉이야기’로도 유명하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 또한 그에 못지않다. 스님은 불교신문과의 인연이야기를 위한 인터뷰 요청에 가까운 곳에서 차나 한 잔 하면서 자격이 되는지 판단해 보라며 신문사와 가까운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사무실에 자리를 마련했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몇 번을 만나도 겸손함, 배려심이 묻어나는 스님이 있다. <성철스님 시봉이야기>로 유명한 원택스님이다. 해인사 백련암, 산청 겁외사, 부산 고심정사, 백련불교문화재단, 도서출판 장경각에서도 만날 수 있지만 스님과 차담을 나눈 곳은 10월23일 불교신문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 사무실이다. 

스님은 1972년 출가 이후 40여 년간 성철스님(1912~1993) 시봉과 추모로 일관해온 터라 ‘성철스님의 영원한 시자’로 널리 알려졌다. 은사 스님 열반 후에도 추모사업을 해오는 가운데 조계종 총무부장, 중앙종회의원 등을 거쳐 지난해부터 민추본 본부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해 왔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일도 있다. 

바로 불교신문 사장(1999.10.18 ~11.23)이다. 당시 발행인 겸 총무원장 고산스님의 사퇴로 총무부장 원택스님이 불교신문 사장이 된 것이다. 앞서 스님은 총무원 총무부장으로 불교신문 부사장을 겸직하고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도 직원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총무원장 스님 관련기사로 본의 아니게 눈총받을 때도 있었다. 

“(총무원장 스님이) 왜 내 사진이 작아? 어른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 딴에는 ‘매번 나오지 않습니까?’하는 인상을 짓게 되고, 돌아오는 반응은 ‘니도 똑같아’ 하는 그런 표정이라고 할까?” 총무원장 스님을 보필하는 위치에 있다 보니 스님도 신문사 실무자가 들어야 할 말씀을 더러 듣기도 한 것이다.

“총무원장 스님을 모시는 우리들로서는 사진 한 장 배치할 때도 기자들이 상당히 애쓰고 있다는 걸 잘 알기에 어른 스님이 만족하지 못할 때는 신문 들고 가서 ‘왜 이랬어’ 하지도 못 하지 않습니까.” 

스님의 소탈한 표현에 창간60주년 맞이 특별인터뷰는 식구끼리 나누는 이야기같이 가벼워졌다. 불교신문과의 인연담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는 일상이었지만 원택스님에게 있어서는 비교적 늦게 시작됐다. 

불교신문이 창간된 1960년도에 스님은 고등학교를 다니며 불교활동을 할 때였지만 안타깝게도 절에 가서도 불교신문을 접할 수 없었다. 원택스님이 불교신문을 가까이 할 수 있던 것은 해인사 총무 소임을 맡게 됐을 때다. 법전스님이 주지 소임을 두 번째 맡았을 때 큰 절(해인사) 소임을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신문을 접하게 된 것.

“성철스님께서는 백련암에 들어와서는 책도, 글도 일체 못 보게 하셨잖습니까. 화두만 들으라 하셨으니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볼 수 있는 곳은 큰 절 뿐이었어요. 1972년 출가한 이래 해인사 총무 소임 맡을 때까지 20년 가까이 백련암에서만 살았으니 바깥 세상에 대해서는 상식이 없었잖아요. 그렇게 해서 불교신문을 처음으로 접하게 됐던 기억이 나고 그럽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불교신문을 더 열심히 보게 된 것은 1981년 성철스님이 종정에 추대되면서다. 그것도 ‘(성철)스님 몰래 불교신문, 사회 일반 신문을 본 것’이다. 누구라도 3000배를 해야 백련암에 드나들 수 있었던 시절 성철스님이 세상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이 살고 있는데, 시자조차도 세상을 모르고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지금 같은 인터넷 시대도 아니고. 사회가 소란할 때는 종정 스님에게 한 말씀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고 그러니까 세상이 또 종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초지종을 알고 있어야 했던 겁니다. 성철스님이 ‘그거 뭐꼬?’ 언젠가 한 번은 물으실 게 확실하니까 불교신문을 보게 된 거고. 그러다 지금까지 열심히 보게 된 거죠.” 

짧은 차담이었지만 얘깃거리는 더 이어졌다. 10ㆍ27법난 이후 일이다. 지환스님(동화사 유나 역임)이 성철스님과 외부와 통로 역할을 할 때 성철스님의 생각이 불교신문 통해 두 차례나 독자들에게 전해졌다. 1980년 12월21일자 2면에 실린 글로 성철(해인총림 방장)스님의 ‘한국불교의 전통과 전망(불교중흥을 위한 제언)’이다. 신문에는 “기획위원회에서 방장 스님을 찾아뵙고 면담, 청취한 것을 게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철스님이 1967년 해인총림 초대방장이 되고 동안거 법문이 실리면서 신문에 등장하게 되고, 결제ㆍ해제 법문이 다 실리니 성철스님께서도 불교신문을 알게 됩니다.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확인됐지만) 스님 이름으로 신문에 직접 이야기 한 것은 이 것 외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원택스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부처님오신날 한글법어 게재다. 불교신문에 법어를 전하고, 법어가 나온 신문을 챙겨야 하는 것도 시자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 

“1981년 총무원에서 요청이 와 법어를 주시는데 상당법어식이라. 외람된 표현이지만 그걸 받아 신문사에 보내려고 하니 기가 찬 거라. 오천만 국민이 볼 건데 전부 한문이고”. 그래서 원택스님은 용기 내서 성철스님에게 말씀드렸다. “이제 큰스님께서는 그냥 해인사 방장 성철스님이 아니고, 대한불교조계종 대표로서 공인이 되셨습니다. (상당법어 식으로)그렇게 말씀하시면 국민들이 알아듣겠습니까? 못 알아듣는 것은 고사하고 이렇게 어려운 법문한다고 욕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아무 것도 모른다고….”
 

성철스님 스스로도 흡족해하던 1982년 부처님오신날 한글 법어 ‘자기를 바로 봅시다’ 친필 원고.
성철스님 스스로도 흡족해하던 1982년 부처님오신날 한글 법어 ‘자기를 바로 봅시다’ 친필 원고.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성철스님께서 ‘이 자식, 내가 왜 세상을 아무것도 몰라. 건방지다’고 시비가 됐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안 돼?’하시기에 ‘예, 이래서는 안 됩니다’ 하니까 ‘그럼 고쳐 봐?’ 하시더니 그 다음날 법어를 주시는 데 한문 반(半) 한글 반(半)입니다. 어떤 예감이 들어서 한 번 더 말씀 드렸죠. ‘스님 한문이 반이 없어졌는데 조금만 더해서 완전히 한글로 하면 안 되겠습니까?’ 했더니 다시 목소리 커지셨습니다. ‘인마, 이것도 밤새서 고친 거다. 이게 어디 쉬운 줄 아나 인마, 밤새도록 고쳤다’며 허전하다 하십디다.”

“한문으로 쫙 써 내려가던 것을 한글로 고치다 보니 ‘뭔가 뻥 뚫린 것 같고. 그거 니는 모른다’하시면서 허전해 하셨습니다. 요 반만 한글로 쓰시면 되는 데 한 번만 더 해주시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 번 더 말씀 드리니 툴툴거리며 당신 방으로 들어가셨는데 다음날 ‘아따 정말 힘들었다’면서 법어를 순 한글체로 고치신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그 해 부처님오신날 법어가 처음으로 한글체로 나가게 됐고, 그 다음해 ‘자기를 바로 봅시다’ 한글법어가 나갔는데 그것은 성철스님께서 평생 좋아하셨습니다. ‘한글로 써도 말이 되네’ 그러시면서….”

“그렇게 해서 부처님오신날 법어는 늘 성철스님께서 손수 쓴 원고를 신문사에 보내게 하셨으니 시자인 저와 불교신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또 (성철스님) 당신도 직접 쓰신 글에 관심이 가는지 법어 실린 신문이 나올 때 되면 ‘큰 절 가서 불교신문 한번 가져와 봐라’ 하시면서 신년법어와 부처님오신날 법어 나온 신문은 꼭 읽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제일 신경 쓰이는 게 오자(誤字) 아니겠습니까. 기자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오자가 없는지 보고 또 보고” 했을 만큼 스님은 불교신문의 흐름도 놓치지 않고 있다. 원택스님은 ‘탄생100주년 성철스님의 자취를 찾아서(취재 이진두),’ ‘성철스님과 나의 법연을 말하다(대담=원택스님, 정리=이진두)’와 같은 기획안을 직접 신문사에 제안해 2년여 동안 연재를 이끌어 가기도 했다. 

“하루가 10년 같고 10년이 하루 같은 속에서 사는 곳이 절이다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2003년 불교신문이 주2회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그때 과연 우리 불교신문이 주2회 발행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말하자면 한주가 반토막이 날만큼 사건사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사를 어디서 담아오려고 겁도 없이 이렇게 하나 걱정을 했죠. 기자들은 그런 걱정 안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걱정을 되게 하면서 얼마가지 못하지 싶었는데….” 스님은 그간 불교신문 직원들의 고생에 대한 격려와 함께 당부가 섞인 아쉬움도 감추지 않았다.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 종단 소식을 접한다는 것은 빠른 세월을 적응해가는 우리 스님들에게도 다행이 아닌가 싶고. 반면, 속보성에 젖으니 다른 신문에서 볼 수 있는 기획기사 같은 것은 줄지 않았나 하는 인상이 있어요. 그동안 ‘암자’ 관련 책 같은 것도 나왔지만 아직도 구석구석 찾아보면 암자나 어떤 사찰역사와 문화 등과 관련해 전해줄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 않나 싶어요. 다른 매체들이 다루지 못하는, ‘틈새 기사’라고 할까. 축적된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이야기,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활동 이런 것들을 좀 더 살펴주는 기사들을 좀 더 많이 확보해 연재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번 씩 해봅니다.”

도반(道伴)이 아니면 전해주기 쉽지 않은 이야기다. 

[불교신문3537호/2019년11월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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