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육필집 ‘낡은 옷을 벗어라’에 수록 글 보니

부처님 생명존중 사상 설파
대장경 번역에 대한 비판의식
봉은사 부지 매각 반대 표명
인간미 넘치는 詩도 들어있어

낡은 옷을 벗어라 

법정 글 / 불교신문사

불교신문이 지난 2010년 불교신문 영인본에서 발굴해 내 법정스님 미출간 원고 68편을 엮어 ‘법정스님 원적 10주기 추모집’으로 발간한 <낡은 옷을 벗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책이다.

그동안 법정스님의 글을 이야기할 때는 자연친화적이고 잔잔한 수필형태의 칼럼이 주류를 이룰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한 <낡은 옷을 벗어라>는 법정스님이 출가 초기와 중기 시절 냉철한 이성으로 결기 넘치는 비판의식이 가득한 글들을 쏟아내고 있다.

여기에는 불교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보듬는 설화와 문학적 감수성이 넘치는 시, 불교종단에 대한 발전적 대안을 제시하는 칼럼과 논단 등 68편이 들어있다. 하마터면 신문 영인본에 묻혀 스님의 혈기 넘치는 목소리가 사라져버릴 뻔한 것을 이번에 불교신문사가 단행본으로 엮어 냈다. 그 내용들의 몇 편을 살펴본다. 

➲ 설화 ‘연둣빛 미소’

비록 겉모양은 물고기나 짐승들이 우리들과 서로 다르지만, 모든 생물의 근원인 그 생명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를 수가 없다. 아기 자라와 어미 자라의 눈물겨운 정리(定離)가 우리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랴! 그런데도 우리는 나를 살찌게 하기 위해서 단 하나뿐인 남의 소중한 목숨을 빼앗고 있으니, 이러고도 만물 가운데 영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들의 식탁이 기름질 때, 그것은 곧 도마 위에서 원통하게 죽은 고기들에 의해서 된 것임을 안다면, 부모와 형제 자녀 그리고 이웃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감히 목에 넘길 수 있겠는가! -1964년 7월 19일

○… ‘아기 자라’가 ‘엄마 자라’에게 시장에서 스님이 방생하며 기도하는 이야기를 창작한 설화로 동화에 가깝다. 스님이 ‘식물성왕국’ 주민인 어느 보살님 집 아이의 생일을 맞아 잡힌 자라를 방생하는데 그들이 짓은 미소가 ‘연둣빛 미소’다.

불교의 불살생의 계율과 생명존중에 대한 가르침이 잔잔한 이야기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위의 글은 ‘후기’에 달아 놓은 글로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인간이 식탁에서 배불리 먹는 것이 도마 위에서 원통하게 죽은 고기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경책을 가하고 있다. 

➲ 논단 ‘부처님 전 상서’ 

부처님!
극락행 여권을 발급하고 있는 데가 있다면 세상에서는 무슨 잠꼬대냐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 암흑의 계절 중세가 아니라, 오늘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일입니다. 그것도 푸닥거리나 일삼는 ‘무당절’에서가 아니라 이 나라에서도 손꼽는 대찰(大刹)들에서 버젓이 백주에 거래되고 있으니 어떻겠습니까? ‘다라니’라는 것을 찍어서 돈을 받고 팔고 있습니다. 야시장도 아닌데 이런 넋두리까지 걸쳐서 “극락으로 가는 차표를 사가시오.” 하고 말입니다.
 -1964년 10월 18일 

○… 모두 3편으로 구성돼 있는 이 논단은 당시 불교전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부처님에 아뢰는 상서문 형식으로 잘못을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글이다. 스님의 냉철한 이성과 불교에 대한 뜨거운 감정을 엿보게 하는 역작이다. 
 

불교전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부처님에 아뢰는 상서문 형식으로 잘못을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글 ‘부처님 전 상서’가 실린 불교신문(당시 대한불교) 지면.
불교전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부처님에 아뢰는 상서문 형식으로 잘못을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는 글 ‘부처님 전 상서’가 실린 불교신문(당시 대한불교) 지면.

➲ 칼럼 ‘낡은 옷을 벗어라’

졸속주의가 낳기 마련인 부실과 단명(短命)을 이제 우리가 할 신성한 불사에만은 제발 되풀이하지 말자는 말이다. 만약 오늘 이 땅에 부처님이 출현해서 말씀을 하신다면 어떠한 말씀을 어떻게 하실까? 한말식(韓末式) 사고로써 그 시절에 쓰던 한어식(韓語式)으로 말씀을 하실까? 아니면 지금의 우리 귀에 익은 우리말을 쓰실까? 철 지난 옷을 언제까지고 걸치고 있으려는 고집은 이제 웃음거리밖에 낳을 것이 없다. 겨울이 지나가면 봄철이 온다는 이 엄연한 우주질서를 이제는 더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새로운 계절 앞에서 그만 낡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려는가? -1965년 2월 28일

○… 출가 후 강원에서 공부한 스님이 한문대장경을 번역하면서 시대에 맞게 대장경을 우리말로 번역해 시대를 이끌어 가야 함을 지적하고 있는 글이다. 스님은 문학적 감수성으로 겨울이 지나가면 봄이 오는 우주질서처럼 새로운 계절 앞에 낡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새옷을 갈아입자고 설파한다. 

➲ 시 ‘병상에서’

누구를 부를까 / 가까이는 부를 만한 이웃이 없고 / 멀리 있는 벗은 올 수가 없는데… // 지난밤에는 열기(熱氣)에 떠 / 줄곧 헛소리를 친 듯한데 / 무슨 말을 했을까 // 앓을 때에야 새삼스레 / 혼자임을 느끼는가 / 성할 때에도 늘 혼자인 것을 // 또 / 열이 오르네 / 사지(四肢)에는 보오얗게 / 토우(土雨)가 내리고 / 가슴은 마냥 가파른 고갯길 // 이러다가 육신은 / 죽어가는 것이겠지… // 바흐를 듣고 싶다 / 그중에도 / ‘토카타와 푸가’ D단조를 / 장엄한 낙조(落照) 속에 묻히고 싶어 // 어둠은 싫다 / 초침 소리에 짓눌리는 어둠은- / 불이라도 환히 켜둘 것을 // 누구를 부를까 / 가까이는 부를 만한 이웃이 없고 / 멀리 있는 벗은 올 수가 없는데… -1965년 4월 4일

○… 서울에서 생활하며 불교신문에 한창 글을 기고할 때 쓴 시다. 혼자 사는 수행자가 몸이 아프면서 겪는 일상사로 ‘가까이 부를 이웃이 없고’, ‘멀리 있는 벗은 올 수가 없다’고 노래하고 있다. 수행자의 외로움이 절절한 인간적인 감성이 넘치는 스님의 면모가 철철 넘치고 있다.

➲ 칼럼 ‘침묵은 범죄다’

불교회관 건립은 몇 해 전부터 논의된 우리 종단의 염원이다. 그 회관을 세우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봉은사 같은 도량을 팔아서까지 회관을 세우지 않으면 안될 만큼 시급한 일인가에는 의문이 없지 않다. 봉은사는 잘 알다시피 한국불교사상 영구히 기억될 도량이다. 불교가 말할 수 없이 박해를 받던 이조시절 허응(虛應) 보우(普雨) 스님에 의해 중흥의 터전이 구축된 데가 이곳이며, 서산·사명 같은 걸승의 요람이 된 곳도 바로 이 봉은사인 것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라거나 또는 불교 중흥의 도량이라는 과거를 무시하고라도, 한수이남(漢水以南)에 자리 잡은 그 입지적인 여건으로 보아 앞으로 우리 종단에서 다각도로 활용할 수 있는 아주 요긴한 도량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1970년 2월 8일

○… 강남 봉은사의 부지가 팔리는 사안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반대하는 결기 넘치는 스님의 마음을 담은 글이다. 당시에도 의견이 분분했고, 종단의 지도부 스님들의 주도하에 봉은사 부지 10만여평이 매각돼 버린다. 당시 봉은사 부지가 14만여평이었으니 2/3의 땅이 매각된 셈이다. 50여년이 지난 현재 그 부지의 일부는 한전부지가 되어 천문학적인 땅값이 되어 있다. 법정스님과 같은 의견이 관철되었다면 현재 봉은사의 사격과 조계종단의 위상은 엄청나게 달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법정스님
법정스님

 

◼ 법정스님은…

한 시대를 살다간 ‘맑고 향기로운 선지식’

1932년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안길 81(선두리)에서 우수영에서 태어났다. 한국 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인간의 선의지와 삶과 죽음에 고뇌하며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섰다. 1956년 효봉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은 후 통영 미래사,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서 스승을 모시고 정진했다. 이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에서 수행자의 기초를 다지고 1959년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1960년 통도사에서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동참하였고, 1967년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스님과 더불어 불교 경전 번역을 하며, 불교계 언론과 유력한 신문에서 죽비 같은 글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973년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1975년 젊은 목숨을 앗아간 제2인혁당 사건을 목격한 스님은 큰 충격을 받아 그해 10월 본래 수행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무소유 사상을 설파하며 자기다운 질서 속에 텅 빈 충만의 시기를 보낸다. 

하지만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고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을 피해,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1992년 4월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고 생명 중심의 세상을 명상하며 홀로 수행 정진했다. 1993년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 모임’을 발족하여, 1994년 3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첫 대중 강연을 시작으로 서울, 부산, 대구, 경남, 광주, 대전 등지에서 뜻을 함께 하는 회원들을 결집해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모임’을 이끌었다. 스님의 무소유 사상에 감동한 길상화(故김영한) 보살이 7천여 평의 대원각을 시주하여 1997년 12월 14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창건됐다. 

세속 명리와 번잡함을 싫어했던 스님은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며 청빈을 실천하였다.

스님은 폐암이 깊어진 뒤에도 침상에서 예불을 거르지 않았으며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며,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말씀을 남긴 뒤 2010년 3월 11일(음력 1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에서 원적(세수 78세, 법랍 55세)에 들었다.

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