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받는 고통 각성해 낙원지(樂園地)로 전진하자”

일제강점기 해안스님 자료 확인
불교 잡지에 학명스님 ‘추모’ 글
3학급 해성학원 교육사업 참여

언론에 처음 공개되는 1920년대 불교중앙학림 또는 북경대 유학 시절 학우들과 함께한 해안스님 (가운데).                                               제공=동명스님
언론에 처음 공개되는 1920년대 불교중앙학림 또는 북경대 유학 시절 학우들과 함께한 해안스님(가운데). 제공=동명스님

근현대 선지식으로 존경받으며 불교전등회(佛敎傳燈會)를 창립해 중생을 제도한 해안봉수(海眼鳳秀, 1901~1974) 스님이 청년시절 남긴 글과 사진을 비롯해 그동안 구전으로 전해진 중국 유학 시절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확인됐다.

본지 취재 결과 해안스님은 1930년 2월 <불교>지에 ‘고(故) 학명대선백(鶴鳴大禪伯)을 추억함’이란 글을 게재했음이 드러났다. 내소사 주지 김봉수(金鳳秀)라는 필명의 이 글은 명성에 비해 행장이나 사상이 베일에 가려 있던 백학명(白鶴鳴 1867~1929) 스님을 조명하는 귀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봉수는 해안스님의 속명이다.

학명스님이 열반한 이듬해 게재된 이 글에서 해안스님은 “등에는 걸망, 손에는 주장자, 운수(雲水)에 집을 둔, 님의 일생은, 봄에는 금강(金剛), 가을엔 지리(智異), 가다가 변산(邊山), 오다가 내장(內藏), 어듸가 주처(住處)임닛가, 어듸가 부주처(不住處)임닛가?”라며 학명스님의 생애를 기렸다.

또한 “큰빗(빛) 가진 그 눈, 큰소리 가진 그 입, 님의 눈은 법계일(法界一)의 눈입니다. 법계일의 입입니다”면서 “오-님이시여! 오날(오늘)은 그 눈 그 입을 추억하는 날입니다”고 추도했다. 글의 말미에는 ‘불기 2956년 11월18일’이라 적혀 있다. 불기 2956년은 서기 1929년으로 학명스님 열반 직후에 쓴 글로 보인다.

<근대 불교혁신 운동과 불교가사의 관련 양상 - 학명의 가사를 중심으로>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김종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선농일치를 주창한 학명스님은 그 당시 젊은 학승을 포함한 불교계 전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면서 “해안스님의 추모 글은 학명스님 가르침을 조명하는 소중한 자료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불교전등회 창립 50주년에 즈음해 해안스님을 기리는 심인탑이 지난 10월 내소사 지장암에서 선보였다.
불교전등회 창립 50주년에 즈음해 해안스님을 기리는 심인탑이 지난 10월 내소사 지장암에서 선보였다.

불교전등회 창립 50주년 맞아
상좌 동명스님 심인탑 조성해
“은사 가르침 알리는데 최선…”

1927년 8월 18일자 동아일보의 ‘해성학원(海星學院) ○경(○境)’이란 제목의 기사에는 “중국 북경에서 유학하다 귀국한 김봉수씨(氏)가 차(此, 이)를 개탄하야”라는 내용이 실렸다. 즉 해안스님의 중국 북경 유학을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기사이다.

특히 이 기사는 해안스님이 박형술(朴亨述)과 함께 협력해 내소사 지장암에 개설한 야학(夜學)을 주학(晝學,낮에 수업하는 학교)으로 변경했다는 사실도 보도하고 있다. 당시 교명은 해성학원으로 3학급을 운영했는데, 경영에 어려움이 있다고 전했다.

일제강점기 청년승려들은 조선독립과 불교혁신을 도모하고 해외문물을 익히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중국 등으로 유학을 떠났다. 김성숙, 윤종묵, 김봉환 등 불교유학생들은 1923년 10월 재연경(在燕京)불교학생회를 조직했다. 일본 당국이 1925년 3월 작성한 ‘북경 천진 부근 재주(在住) 조선인 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해안스님은 고려유학생회 내(內) 불교학생회원으로 1924년(대정 13년) 가을에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같은 자료에는 한봉신, 김성숙, 김규하, 김정완, 윤종묵, 윤금, 김봉환, 차응준 등의 명단이 실려있다. 한봉신은 1925년 1월, 윤금은 1924년 여름 귀국한 사실도 적혀 있다. 또한 불교학생회가 잡지 <황야(荒野)>를 발간한 기록도 전한다.

한편 1924년 가을 귀국한 해안스님은 교육, 전법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동아일보 1925년 8월11일자와 9월3일자에 따르면 불교개혁을 위해 결성된 철우회(鐵牛會)에 적극 참여한 사실도 확인된다. ‘철우’는 움직이거나 뚫을 수 없는 경지를 나타내는 선가(禪家)의 용어이다. 1925년 8월 2일 정읍 내장사에서 창립한 철우회에는 해안스님과 박장조(朴長照, 1887~1978) 스님 등 당시 호남지역의 스님 20여 명이 참여했다.

그해 8월 29일 고창 선운사에서 열린 철우강연회에서 해안스님은 ‘조선인의 시대고(時代苦)’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해안스님의 강연 내용을 “현시(現時) 우리의 밧는(받는) 고통을 각성하야 낙원지(樂園地)로 전진하자는 의미의 기염(氣焰)을 토(吐)하고”라고 생생하게 전했다. 일제의 침탈을 당한 조선인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 해안스님의 기개(氣槪)가 느껴진다.
 

일본 당국이 1925년 3월 작성한 ‘북경 천진 부근 재주(在住) 조선인 상황 보고서’의 ‘불교학생회’ 부분. 해안스님의 속명인 김봉수가 명확히 보인다.
일본 당국이 1925년 3월 작성한 ‘북경 천진 부근 재주(在住) 조선인 상황 보고서’의 ‘불교학생회’ 부분. 해안스님의 속명인 김봉수가 명확히 보인다.

이밖에도 본지가 취재한 결과 부안 지역에서 소작인의 권익 옹호를 위해 구성된 ‘소작동우회(小作同友會)’ 참여 인사 명단에 김봉수(金鳳洙)라는 이름이 나온다. 비록 마지막 한자가 다르지만 해안스님일 가능성이 크다.

1917년 부안 내소사에서 만허(滿虛)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해안스님은 장성 백양사 지방학림과 불교중앙학림(지금의 동국대)에서 내외전을 익히고, 중국 북경대로 유학을 떠났다가 중도에 귀국했다. 이후 문맹퇴치운동과 포교활동에 나섰으며, 금산사·내소사 서래선림 조실에 이어 1969년에는 불교전등회 대종사로 만들어 전법에 매진했다.

한편 서울 전등사 회주 동명스님(조계종 소청심사위원장)은 지난 10월8일 내소사 지장암에서 불교전등회 창립 50주년에 즈음해 해안스님을 기리는 심인탑(心印塔)을 조성하고 대중과 함께 탑돌이를 했다. 심인탑은 국보 제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智光國師塔)을 그대로 재현해 의미를 더했다.

동명스님은 “은사스님께서 전하신 가르침이 지금도 생생하다”면서 “이번에 확인된 자료들을 접하고 보니, 은사스님의 치열한 구도행을 새삼 마음에 새기게 된다”고 말했다. 동명스님은 “큰스님의 뜻이 후대에 잘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안수행관’ 건립 등 선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그것이 불은(佛恩)과 시은(施恩), 그리고 은사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며 정진하고 있다”고 합장했다.

부안=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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