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무엇 때문에 다시 왜국에 온 것인가?”

미해와의 재회

“제상,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복호 왕자가 했던 말이 미해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것은 박제상도 마찬가지였다. 16년 만에 다시 찾은 왜국은 변함이 없었다. 배가 포구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은 것은 달랑 하급 신하 한 명이었다. 혹시 마립간께서 마음이 약해져서 박제상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선언을 하지 못한 것인가 싶어 왜국 신하의 얼굴만 살폈다. 내내 무표정하던 그는 박제상이 굳은 표정을 끝내 풀지 않자 싱긋 웃더니 말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어쩔 셈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왜국의 왕에게로 곧장 안내해주는가 싶었는데, 박제상이 도착한 곳은 미해의 처소였다. 외지고 본궁에서부터 동떨어져 있는, 한낮에도 빛이 잘 들지 않는 작은 처소였다. 미해는 16년간 이곳에서 지내온 것일까? 미해가 왜국에 도착했을 때 고작 열 살이었는데, 그때부터 이렇게 홀대를 받았단 말인가. 치솟는 화가 사라진 것은 미해의 웃는 얼굴 덕분이었다. 못 보던 사이 소년에서 청년으로 훌쩍 자란 미해가 박제상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제상, 말 좀 해봐. 꿈이 아닌 것을 확인하게.”

들뜬 마음에 자꾸 목소리가 커지는 미해를 보며 박제상은 조용히 입술을 만졌다. 뜻을 알아차린 미해는 금방 입을 다물었다. 그동안 얼마나 눈치를 보면서 살아온 것일까. 박제상은 어린 나이에 왜국의 질자가 되어 16년을 홀로 이곳에서 보낸 미해의 지난 세월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가득했으나 당장은 말을 아껴야 했다. 벽이며 문 뒤에 아마도 듣는 귀가 있을 것이었다. 

“실성 마립간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일부러 뻔히 알만한 이야기를 했다. 미해가 눈을 깜빡이자 박제상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들었어. 그럼 이제 형님이 마립간이 되신 거야?”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 돌아갈 수 있는 거야?”

미해의 입에서 본론이 나왔다. 박제상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믿거나 의심하거나 차라리 처음부터 저들을 속여 버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갈 수 있다면 마립간께서 왜 여태 왕자님께 아무도 보내지 않으셨겠습니까? 왕자님을 생각하셨다면 마립간에 오르시자마자 사람을 보내셨겠지요.”

미해를 걱정하는 따뜻한 눈빛과 달리 박제상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순간 미해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래, 저 선한 심성이 저들을 속일 때 도움이 될 것이다. 박제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말이 없던 미해가 이윽고 힘없이 항변했다.

“그건…. 그대를 보내기 위해서였겠지.”

“하! 질자의 신분으로 계신 분께서 여전히 참 순진하시군요. 그렇게 믿고 싶으셨던 것입니까? 하긴 이렇게 모르는 게 많으니 버려진 것도 모른 채 이곳에서 16년을 버티셨겠죠. 헌데 어쩝니까. 저는 마립간께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마립간을 피해 온 것인데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은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곧 알게 되시겠죠.”

“제상, 그대가 말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어찌 알겠어. 제발 말을 해줘.”

“험난하고 고된 여정이었습니다. 왕자님도 바닷길을 겪어보셨으니 잘 아시겠지요. 그만 쉬고 싶습니다.”
 

박제상이 왜국에 온 이유를
제 입으로 말하기 괴롭다고 
간곡히 양해를 청했지만
왜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눌지가 박제상을 죽이려 하고 
박제상이 눌지를 배신했다는 게 
믿기지 않던 왜왕은 오히려 
더 단호한 어조로 물었다 

“괴롭더라도 말하라 
도움을 청하러 온 주제에 
거부할 권리 따위는 없다” 
왜왕의 단호함에 박제상은 …


계략을 꾸미다

박제상이 제멋대로 침상에 눕자 미해는 한숨을 쉬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쉿, 여기 앉으십시오.”

코를 고는 척하던 박제상이 미해의 손을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미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코 고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무렵 박제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일어났다.

“이제 엿듣는 사람들이 물러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염탐한 내용을 왜왕에게 보고하러 갔겠지요. 지금부터는 시중드는 사람 누구도 들이지 마십시오.”

“응”

미해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립간께서 절 보내신 것이 맞습니다. 왕자님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태자로 계시는 내내 왕자님을 그리워하셨습니다. 실성 마립간께서 복호 왕자님마저 고구려에 보내버린 뒤에는 한 번 편히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둘째 형님은 무사히 돌아오신 거지? 그대가 고구려에 다녀왔다고 들었어. 곧바로 보내주었다고. 이들도 비슷할 거야. 나는 별로 중요한 존재도 아닌걸.”

“그렇지 않습니다.”

박제상은 고개를 저으며 낮게 속삭였다.

“서라벌의 소식은 이곳까지 얼마 걸리지 않아 속속 전해지는군요. 저들은 신국의 일을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왕자님께서 서라벌에 돌아가시려면 저들을 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실성 마립간이 계실 때와 다릅니다. 그가 왕자님을 이곳에 보냈을 때, 왕자는 질자로서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으나 지금은 다릅니다. 눌지 마립간께서는 왕자님을 정말 많이 아끼십니다. 왕자님이 다시 서라벌에 돌아오는 것은 눌지 마립간의 숙원입니다. 그러니 저들은 왕자님을 보내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질자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추신 셈이니까요.”

박제상이 여기까지 털어놓았을 때 밖에 있던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국의 신하께서는 아직 주무시는 중입니까?”

미해의 눈이 흔들렸다. 여기서 의심을 살 수는 없었다. 박제상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마음이 다급해진 미해가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박제상이 짐짓 하품하며 말했다.

“하암, 들어오시게나. 근데 내가 측간이 급해서 말이야. 자는 동안 옷도 다 벗은 데다, 측간을 가려고 아래도 다 벗었는데 정 보고 싶으면 들어오시게. 들어온 김에 내가 볼일 보는 것도 확인하시던지. 이제 부인도 없는 몸인데, 이곳에서 목소리 고운 자네랑 살림이나 차려 볼까나.”

대놓고 무례하게 구는 박제상이 낯설어 미해는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닙니다. 볼일 다 보시면 기척을 주시지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시게. 궁금하면 언제라도 들어오시게.”

박제상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시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왕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 사이에 누가 오거나 뭔가를 물어보거든 왕자님께서는 그저 지금 같은 표정으로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며 계시면 됩니다. 차차 저들 모르게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만들겠습니다.”

시녀가 당황해하는 사이 박제상이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미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제상의 손을 꼭 잡았다. 

왜왕을 속이다

“그대가 오래전 신국 왕자가 올 때 함께 왔다던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포구에서 궁까지 왕자를 등에 업고 왔다지. 그때는 그대를 본 적이 없다. 다시 온 이유가 무엇인가?”

왜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자니 괴롭습니다. 부디 양해해주시길 간곡히 청하옵니다.”

박제상의 말과 태도는 지극히 정성스러웠다. 왜왕과 신하들은 혼란스러웠다. 왜왕의 신하 중에는 백제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학문과 기술이 출중했고 정보력도 대단했다. 앞선 문화를 지녔으면서도 왜국을 무시하거나 왜왕을 배신한 적도 없었다. 단지 군사적 도움을 얻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너무 친밀했다. 백제와 왜국은 질자를 보내는 것을 넘어 왕족 간의 혼인이 이루어진지 오래였다. 이미 왜와 한배를 탄 것이나 다름없는 백제가 왜를 속일 리가 없었다. 박제상이 왜국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 백제 출신 신하는 이렇게 말했다.

‘박제상을 조심해야 합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입니다. 말로는 눌지를 배신하고 쫓겨났다고 하지만, 눌지와 박제상이 어떤 사이인지는 잘 알지 않습니까. 눌지는 제 부인조차도 실성의 딸이라며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눌지가 태자 때부터 신뢰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박제상입니다. 눌지가 박제상을 죽이려 하고, 박제상이 눌지를 배신했다는 것은 어쩐지 찜찜합니다.’

“괴롭더라도 말하라. 도움을 청하러 온 주제에 거부할 권리 따위는 없다. 그리고 눌지 마립간과 그대가 어떤 사이였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왜국에 온 것이지 반드시 그대의 입으로 들어야겠다.”

왜왕의 단호함에 박제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불교신문3534호/2019년11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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