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하루 14시간 이상 정진한다. 둘째, 공양은 하루 한 끼만 먹는다. 셋째, 옷은 한 벌만 허용한다. 넷째, 양치만 허용하고 삭발과 목욕은 금한다. 다섯째, 외부인과 접촉을 금하고, 천막을 벗어나지 않는다. 여섯째, 묵언한다. 일곱째, 규약을 어길 시 조계종 승적에서 제외한다는 각서와 제적원을 제출한다. 여기 이 자리에서 내 몸은 말라버려도 좋다. 가죽과 뼈와 살이 녹아버려도 좋다. 어느 세상에서도 얻기 어려운 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이 자리에서 죽어도 결코 일어서지 않으리라.”

위례 상월선원 천막결사 정진 대중이 동안거 입제에 앞서 밝힌 규약이다. 전 총무원장 자승스님을 비롯하여 9명의 대중들은 상월선원에서 동안거 3개월 간 청규를 준수하며 고행 정진한다. 

상월선원 정진이 특별한 이유는 최악의 조건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비구는 가장 낮은 자가 되어 가장 엄격한 고행을 자처하는, 진리의 탐구자다. 가장 앞줄에 부처님이 계셨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부처님보다 훨씬 높다.

과거처럼 여전히 큰 방에 모여 가부좌를 하지만 지극히 낮은 자의 극한 고행과 거리가 멀다. 각처에서 가져온 음식, 전국에서 찾아오는 도반과 단월들의 보시, 1인1실, 법을 논하지도, 경책하지도 않는 편안한 환경은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선원의 일반적 모습은 아니다. 

본래 선(禪)은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함’(直指人心 見性成佛)이므로 중요한 것은 내면이지 외부 환경이 아니다. 그래서 좋은 수행환경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현들이 ‘춥고 배고파야 도를 이루려는 의지가 생긴다(飢寒發道心)’고 경책했던 까닭을 되새겨야 한다. 

안거 때마다 3~4000여 수좌들이 선원에서 목숨을 걸고 정진하는 1000년 넘은 수행문화를 찬탄하면서도 그 한 켠에는 고행이 사라지는데 대한 우려가 적지 않았던 이유다. 그래서 목숨을 건 대중들이 정진하는 상월선원이 특별하다. 

상월선원 정진 대중들이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우리가 갈 길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는 점이다. 우리 종단은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세계 최고 최대 종단을 일궜다. 1만 명이 넘는 수행자들, 1000만 2000만을 헤아리는 불자, 천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수많은 고찰과 광대한 토지, 많은 부와 정치적 영향력 등. 우리는 이러한 성취가 불국토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갈수록 신도 수는 줄어들고 영향력도 낮아지며 신뢰도는 하락하는 예상과 정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복을 짓는 것을 공덕으로 여기는 우를 범한 것이다. 육조대사가 이른 대로 “견성이 공(功)이고, 평등하고 곧음이 덕(德)인데” 달마 앞의 양무제처럼 절 짓고 보시하고 공양 올림을 공덕으로 잘못 알고 달려왔다. 

총무원장을 역임한 자승스님은 역대 어느 총무원장보다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많은 복을 짓고도 죽음을 걸고 고행정진을 자청하는 이유는 진정한 공덕이 오직 마음으로 짓는 것임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종단이 가야할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상월선원 대중들의 건강한 회향을 염원한다. 

[불교신문3533호/2019년1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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