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은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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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한창 익어 가는 날 아침, 지인의 초청을 받고 태백 쪽으로 길을 나섰다. 약속시간보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출발했다. 오랜만에 일 없이 맘 편하게 단풍구경이나 하면서 설렁설렁 갈 요량이었다. 초행길이라 내비게이션을 찍을까 하다가 대충 아는 곳이라 그냥 가보기로 했다.

여기서 태백으로 가자면 보통 도계를 거쳐 가는데, 일부러 댓재를 거쳐 하장으로 가는 꾸불꾸불한 길을 택했다. 이 길은 좀 험하고 위험하긴 하지만, 백두대간 준령들의 장엄한 실루엣과 멋진 단풍구경을 하기엔 이만한 곳도 없다. 경치에 취해 한참 가다보니 낯선 길이 나왔다. 아차! 아까 갈림길에서 좌회전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이었다.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좀 둘러가는 셈치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어쨌든 서쪽방향으로만 가면 된다 생각했다. 약간의 긴장과 낯선 풍경들의 설렘이 교차됐다. 그러다가 한 고개를 넘어서자 온 산이 하얀 자작나무 숲이 나타났다.

자작나무. 나무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이다. 가을 날 온 산을 물들인 단풍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귀족 같은 나무가 자작나무이다. 마치 고귀한 수행자의 표상 같기도 하다. 너무나 뜻밖의 경치에 잠시 차를 세워 놓고 근처까지 산책을 갔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황홀한 풍경이었다. 

우리는 늘 편안하고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어쩌다 실수로 들어선 낯선 길에서 찬란한 풍경을 볼 수도 있는 것처럼, 지금 내가 끌어안고 있는 풀리지 않는 문제가 오히려 엉뚱한 곳에서 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한 행운’은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 상황에 도달하기까지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해본 사람이라야 맞이할 수 있다.

인류 문명을 뒤바꾼 발명이나 발견들도 우연히 이루어진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생길을 가다가 이 길을 잘못 들어섰나 하고 후회할 필요는 없다. 다만 마주친 상황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실수를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연은 나에게 다가와 ‘행운’이 된다.

[불교신문3533호/2019년11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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