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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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 언론사 기자와 얘기하는 중에 “불교 토론에는 언제나 답이 정해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무슨 얘기냐고 물으니, “언제나 답은 화쟁”이라는 것이다. 문제와 상관없이 서로 화합해서 잘해보자는 이상 제시가 결론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새로운 주제의 토론이 잡혀도 불교계 기자들은 누구도 기대감을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 답이 뻔하니 기대감도 없는 것이다. 한두 번 이렇게 한 것이 아니니, 양치기 소년처럼 인식되어있는 셈이다.

해서 나는 이런 식의 태도야말로 가장 위험하고 불교 발전을 저해한다고 말해줬다. 화쟁은 원효의 중심사상으로 다양한 관점과 이견(異見)들을 보다 높은 본질적 측면에서 통합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각 산은 분리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대지에 기반하고 있으며, 바다의 파도는 다양하지만 근본인 심연은 언제나 고요한 것처럼 말이다. 즉 다양성을 본질의 관점에서 회통하여 융회하자는 주장이다. 

화쟁은 단순히 여러 이견을 한데 뭉뚱그리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재료를 한데 뒤섞어 잡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하고 보다 높은 관점을 제시하는 통합인 것이다. 중도가 양쪽의 중간이라는 의미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이상론에 가깝다.

자본주의가 한계에 봉착해서 자본의 양극화가 심각하니, 이제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실상 불가능하다. 말은 맞지만 원론적인 ‘빛 좋은 개살구’가 되기 쉽다. 

원효가 산 시대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직후다. 이는 분열에서 통합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중국불교는 위진 남북조의 혼란 속에서 다양한 교리와 경전이 갈등했다. 이를 통일왕조인 수나라 천태대사가 정리한다. 이는 후일 당나라의 번영과 함께 현장과 법장에 의해서 진전된다.

원효의 시대 역시 중국의 통일 및 중국불교의 문제의식과 궤적을 같이한다. 이렇게 해서 등장하는 것이 화쟁 사상이다. 그러나 원효 스스로는 무엇을 했는가? <무애가>를 부르며 시대의 반항아적인 삶을 산 것이 전부이지 않은가? 즉 원효의 화쟁 주장에는 치열한 실천과 성공은 없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을 도운 명나라군은 중국의 전쟁 신인 관우 사당을 건립하고 승전을 기원했다. 그러나 관우는 자신이 속한 촉한(蜀漢)을 구하지도 못했고, 또 육신도 보전하지 못해 목과 몸이 분리되는 최후를 맞았다. 전쟁의 승리는 자신의 앞가림도 하지 못한 관우의 일이 아닌 것이다. 

원효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원효의 망령에 휩싸여 한국불교는 오늘날도 화쟁만을 말하고 있다. 진정한 화쟁은 각각의 현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를 능가할 수 있는 관점이 필연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불교의 태도는 영조의 탕평채나, 모든 재료를 쓸어 넣는 비빔밥과 같은 태도에서 한 발자국도 진전하지 못한다.

명료한 분석이 선행되지 않으면 통합은 불가능하다. 타오르는 불이 물이라는 말로 꺼질 수 없듯, 적당히 얼버무리는 덕담 식 해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때문에 오늘날 한국불교에 필요한 것은 화쟁이 아니라, 정확한 분석과 이에 근거한 합리적 판단이다.

[불교신문3532호/2019년11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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