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34> 강릉 등명낙가사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34> 강릉 등명낙가사
  • 박부영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9.11.0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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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침입 왜구 침입 맞서 나라 수호한 호국도량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고려시대 중흥

남북대치 최전방 바다 위치
오백나한 모시고 통일발원

경덕 청우스님 60여년 원력
500여년 꺼졌던 法燈 밝혀

서울 광화문에서 동쪽으로 똑바로 가면 닿는 육지의 끝을 정동진(正東津)이라고 부른다. 한적한 바닷가는 지금은 전국 최고 명소다. 인기 드라마 ‘모래시계’가 이 곳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일거에 최고 관광지로 부상했다.  

정동진 옆은 조선시대 수군(水軍) 진영이 설치됐던 해안방어기지 안인진(安仁津)이다. ‘강릉 동쪽의 편안한 곳’이라는 뜻이다. 정동진에서 안인진까지 해안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다. 눈부시게 푸른 동해 바다 물결과 바닷 바람을 막아선 소나무 방풍림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눈을 뗄 수 없다. 그 중간에 천년고찰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다. 등명낙가사(燈明洛伽寺)다. 
 

등명낙가사 중심인 대웅전에서 바라보는 경내와 동해의 아름다운 풍경.
등명낙가사 중심인 대웅전에서 바라보는 경내와 동해의 아름다운 풍경.

관광명소 정동진 바닷가 위치

가을이 오는 10월 중순 평일 한낮인데도 적지 않은 관광객이 절을 찾았다. 10여년 만에 만난 절은 완전히 달라졌다. 일주문에서 경내로 난 도보길은 운치를 더했으며 가람이 넓어졌다. 

등명낙가사는 조선 중엽 폐찰된 것을 1956년 경덕스님이 발원하고 현 주지 청우스님이 이어서 60여년에 걸쳐 진행됐다. 이름 그대로 불법(佛法)의 등불이 500여년 만에 다시 켜진 것이다. 

경덕스님은 10여 채의 민가를 옮기고 옛 극락전을 지어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보타낙가산을 따 등명낙가사로 개명했다. 1970년대 총무원장 경덕스님을 두 달여 모셨던 청우스님은 그 인연을 놓지 않고 스님과 함께 폐허가 된 낙가사터를 대찰로 탈바꿈시켰다. 

청우스님은 16만평의 임야를 매입해 종단에 등록하고 영산전 50평 삼성각 범종각 극락전 약사전 안심당 요사채 일주문 문수당 조실당 전등선원 누각을 새로 창건했다. 30대 수좌는 이제 희수(喜壽)의 노스님이 됐다. 그러나 스님의 원력은 헛되지 않았다. 동해바다를 환히 밝히던 부처님의 광명이 500여년 만에 다시 켜졌으니 이보다 귀한 삶이 없다. 

등명낙가사는 창건부터 현대까지 언제나 이 땅의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호국도량이었다. 1300여 년 전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창건 당시 강릉은 신라와 고구려 접경지로 전쟁이 끊이지 않던 최전방이었다. 동해바다 너머 왜구가 상륙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자장율사는 절을 짓고 세 기의 탑을 세웠다. 고구려와 왜구의 침입을 막고 불국정토를 이룬다는 원력을 세 기의 탑에 담았다. 처음 사찰 이름은 동해 바다의 뜻을 담은 ‘수다사(水多寺)’였다. 

고려시대에 다시 이름을 바꾸니 ‘등명사(燈明寺)’다. 개명과 함께 대대적 중창불사가 진행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절이 암실의 등화와 같은 위치에 있고 공부하는 사람이 삼경(三更)에 등산하여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가 빠르다고 한데서 등명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근처에 절의 물품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짓고 성을 쌓았던 자취와 고려 성터가 남아 있어 당시 절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신라 자장율사가 절을 창건하며 세웠다는 오층석탑.
신라 자장율사가 절을 창건하며 세웠다는 오층석탑.

자장율사 창건한 천년고찰

등명낙가사는 또 오백나한의 주처이기도 하다. 오대산 신앙 전설에 의하면 문수 보현보살이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동해로 내려와서 오대산에 모시고, 보현보살은 보현사에, 문수보살은 강릉 한송사에, 그리고 수다사(등명 낙가사)에는 오백나한이 머물렀다. 그 내력을 이어 청자오백나한을 모셨으며 500명의 회원이 남북평화통일을 염원하는 호국도량으로 자리매김했다. 

고려 시인 김극기는 “불법의 높은 길이 푸른 연봉에 둘러있고 층대 위에 높은 사전(寺殿)은 겹겹이 공중에 솟아있다. 그윽한 숲은 그늘을 만들어 여름을 맞이하고 늦게 핀 꽃은 고운 빛을 머금어, 봄을 아름답게 하여 봉우리의 그림자에 걸렸고 절에서 울리는 북소리는 골짜기에 불어내는 바람을 전한다”라고 노래할 정도로 절경이다. 

번성을 누리던 절은 그러나 조선 중엽 폐찰된다. 왕이 안질을 심하게 앓았는데 그 이유가 정동 쪽에 있는 큰 절에서 쌀 씻은 물을 바다로 흘러 보내 용왕이 노한 탓이라는 궤변을 들어 폐찰시켰다고 한다. ‘아침해가 떠 오르는’ 조선(朝鮮)의 왕실과 유가(儒家)들은 이 땅에서 가장 해가 먼저 뜨는 동해 한 가운데 같은 이름을 가진 절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조선 왕조는 사라졌지만 불법(佛法)의 밝은 빛은 오히려 더 환하다. 상대를 무너뜨려서 자신을 지키려는 자와 자신 보다 전체를 아우르고 희생하는 자의 결말은 이처럼 극과 극이다. 불교는 자신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다. 등명낙가사가 지금 밝게 빛나는 이유다. 

외적으로부터 조국을 수호하고 부처님 가르침으로 세상을 평안케 하는 원력을 담은 오층석탑 세 기 중 두 기는 지금 절에 없다. 경내에 있는 석탑과 똑같이 생긴 쌍둥이 탑은 일주문 우측 능선 위에 동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해안 돌출부에 서 있었다. 1970년대 초반 동해안 경비부대에서 석탑이 있던 자리에 해안을 비추는 조명시설과 경계 초소 건립을 이유로 탑을 무너뜨리고 부재는 바다에 밀어 넣었다. 

주지 청우스님이 바다 속에서 옥개석 등 일부 석탑 부재를 건져내 경내에 모아 두었다. 석탑을 무너뜨리고 들어섰던 초소는 10여년 전 철거되고 빈터로 남았다. 북한의 침입을 경계하는 국토 방위에 석탑은 기꺼이 그 몸을 내주었던 것이다. 

또 한 기 역시 호국을 염원하며 절 바로 앞 바다로 들어갔다. 파도가 잔잔한 날에는 물 속의 탑이 보인다는 소문이 나돌아 한 공중파 방송에서 바다 속을 뒤지기도 했다. 탑은 발견 못했지만 인공으로 쌓아올린 돌무덤이 나와 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바다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다는 원력으로 동해로 들어간 신라 문무대왕처럼 등명사 탑은 또 바다로 갔다. 
 

등명낙가사 입구 모습.
등명낙가사 입구 모습.

석탑 세 기에 얽힌 사연들

최전방을 지키는 호국도량 소임을 부여받은 창건 역사는 천년이 넘은 현대에도 변하지 않았다. 등명낙가사는 여전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장의 한복판을 지키고 서 있다. 낙가사가 가장 최근 목격한 전투는 1996년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이다.

1996년 9월18일 새벽 1시30분경 등명낙가사 앞 해안에서 30m 가량 떨어진 곳에 소형 잠수함이 좌초된 것을 택시기사가 발견하고 경찰서에 신고했다. 생포된 무장공비의 증언에 따르면 이 잠수함은 9월16일 함경남도 원산항을 출발하여 17일 오후 4시경 기관고장으로 표류되어 좌초됐다. 

잠수함이 발견된 등명낙가사 앞 바다는 1950년 6월25일 새벽 3시 북한군의 첫 상륙지다.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한 시각은 이 보다 1시간 뒤인 새벽 4시. 이미 그들은 1시간 전에 북한의 제549 육전대(해병) 선발대를 이곳에 상륙시켰다. 민족의 가장 큰 비극인 6·25 남침이 처음 일어난 곳에서 또 다시 무장공비가 상륙한 것이다. 

무장공비 20여 명은 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내륙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군은 본격 소탕작전에 나섰지만 최정예 부대원인 이들을 완전 소탕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9월에 시작된 작전은 겨울로 접어드는 11월5일이 되어서야 종료됐다. 

침투한 공작원 26명 중 비전투원 11명은 모두 자살했다.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이들의 만행에 국민과 국제사회가 경악했다. 북으로 달아난 1명과 생포된 1명을 제외하면 모두 사살됐다. 북한의 주장대로 좌초였다면 자수하고 목숨을 유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죽는 길을 택했다.

북한은 내가 살기 위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이념으로 세운 체제임을 온 세계가 똑똑히 목격했다. 6·25를 경험하지 않은 대다수의 세대가 ‘지상낙원’을 건설했다는 이들의 실체를 깨달았다. 동해안과 백두대간 일원에서 전개된 전쟁의 참상도 체험했다. 등명낙가사는 현장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잠수함이 좌초됐던 절 정면 바다에 통일공원이 들어섰다. 그 옆 산에는 6·25 남침 사적탑이 있다.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체제가 어떤 비극을 초래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며 평화통일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현장이다. 
 

등명낙가사 명물 감로수.
등명낙가사 명물 감로수.

남북분단 비극 지켜본 가람

등명낙가사는 이제 대찰이다. 등명낙가사 영산전에서 바라보는 동해는 일품이다. 경내에 서면 검푸른 동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대한민국에 이만한 절경을 갖춘 사찰이 있을까 감탄이 절로 나고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오층석탑 앞 누각도 일품이다. 정면의 바다와 뒤돌면 늠름하게 서있는 괘방산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약수도 유명하다. 약간 시큼하고 떫은 맛이 나는 약수는 양이 많아 목욕도 할 수 있을 정도다. 철분 황산염 등의 성분이 들어있어 부인병과 원기 부족에 효력이 있다고 알려졌다. 

아직 철조망이 쳐져 있지만 동해는 이제 긴장과 대립의 현장에서 평화의 길로 거듭나는 중이다. 등명낙가사를 찾는 마음도 과거와 달리 한결 편안하다. 

시원하게 펼쳐진 동해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마음에 와 닿는 그 느낌 그대로 만끽하는 평화시대임을 비극의 현장에서도 확인한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불교가 번창하면 국운이 융성하고 그 반대로 불교가 쇠하면 나라가 쇠한다.” 호국도량 등명낙가사의 과거와 현재가 그 명제가 진리임을 보여준다. 
 

절에서 바라보는 동해.
절에서 바라보는 동해.

강릉=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32호/2019년11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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