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상이 반역죄 저질렀다는 소문을 내십시오”

슬픈 예감

아도와 헤어진 후 일선군에서 서라벌까지 오는 동안 박제상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호안석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박제상은 모례 장자의 집에서 아도와 나눈 이야기를 되새겼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박제상과 마주 앉은 아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왕자께서는 저를 보면 남동생이 생각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막내 왕자님과 닮았습니까?”

검은색 승복은 아도의 하얀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를 돋보이게 했다. 미해가 삭발한 모습은 상상해 본 적도 없지만 뽀얀 피부며 훤칠한 외모는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저는 형제가 없이 자랐는데 막내 왕자님은 삼형제 중 막내여서 애교도 많고 유달리 귀여움도 많이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왜국에 질자로 가셨다지요.”

그때 미해의 나이는 겨우 열 살, 벌써 십수년 전의 일이었다. 실성 마립간의 겁박 앞에서도 의연했던 미해의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이 저릿했다. 

“막내 왕자께서 질자로 갈 때 공께서 모시고 갔다 들었습니다.”

“네. 제가 모셨습니다. 그때는 어린아이였는데 지금은 아마 늠름한 장부가 되셨겠지요.”

“아마도 머지않아 막내 왕자와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네? 고구려에 계실 때 미해 왕자님에 대해 무슨 소식이라도 들으셨습니까?”

박제상이 다급히 묻자 아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막내 왕자님이 많이 보고 싶으신가 봅니다. 시주께서 왕자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크겠습니까? 왕께서 동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크겠습니까?”

“그야 마립간의 그리움이 훨씬 크고 깊을 것입니다. 형제간의 우애가 각별하셨으니까요.”

“왕께서는 태자의 자리에 계실 때 동생들과 억지로 헤어지셨습니다. 이제 왕위에 오르셨으니 동기들을 하루라도 빨리 다시 곁에 두고 싶으실 것입니다. 이제 곧 복호 왕자와 상봉하게 되면 막냇동생이 더 간절하게 보고 싶으시겠지요.”

맞는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박제상을 보며 아도는 계속 말했다. 

“왕께서는 영명하신 분이지만 고구려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이를 곱게 보지 않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지금 왕에게는 믿을 만한 사람이 가장 필요하시겠지요.”

박제상은 아도의 통찰에 놀라면서도 불쾌했다. 아무리 고구려가 신라의 상국이라지만 일개 승려가 쓸데없이 아는 것이 너무 많았다. 박제상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왕께서 복호 왕자님과 만나면 막내 왕자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질 것이고 막내 왕자님을 무사히 서라벌로 데려올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만약 시주님이라면 누구를 보내겠습니까?”

박제상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도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손에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아도가 호안석 염주를 올려놓은 것이다.

“가지고 가십시오. 늘 지니고 계십시오. 어느 나라에서는 장수들과 병사들이 전쟁을 나갈 때 호랑이 눈을 닮은 이 보석을 몸에 지녔다고 합니다.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생명을 지켜주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이리 귀한 것을 저에게 주시다니요.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아닙니다. 시주님께 꼭 드리고 싶습니다.”

박제상은 손을 저었으나 아도의 표정은 비장했다. 

“받으십시오. 늘 지니고 계십시오. 힘들 때 믿고 의지할 곳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래도 견딜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염주가 시주님께 작은 위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나중에 말입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힘이 든 순간이 오거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십시오.”

“나무….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잊지 마십시오.”
 

“제가 가족을 보지 않고 
지금 바로 떠나야 왜국 왕을 
속일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에서 막 돌아온 제상은
일본에 질자로 있는
미해 왕자를 데려오라는
눌지의 간곡한 부탁에 

지체 없이 말을 달려 
배를 탈 수 있는 율포로 향하고 
뒤늦게 남편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율포로 달려온
박제상의 아내는 그만 …


상봉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

서라벌이 가까워져 오자 수다스럽던 복호의 말수도 급격히 줄어들었고 설렘을 감추지 않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아도와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한 박제상은 복호의 얼굴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초조한 듯 연신 마른 침을 삼키며 안절부절못하는 복호의 모습에 보미가 미소를 지었으나 복호의 눈에는 보미의 어여쁜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월성 앞까지 나온 눌지를 발견한 복호는 주저 없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보미는 깜짝 놀라 복호의 등에 매달렸다. 

“마립간을 뵙습니다.”

“복호야”

눌지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하는 복호를 손수 일으켜 품에 안았다. 이어서 박제상이 도착하자 눌지가 말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어머님께서도 네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셨단다.”

보반궁의 문을 모두 열어놓고 기다리던 보반 부인이 복호를 보자마자 달려 나왔다. 복호는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며 눈물을 쏟았다. 

“괜찮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다.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제 되었다.”

복호의 등을 토닥이는 보반 부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눌지와 아로, 궁녀들도 눈물을 훔쳤다. 울지 않는 사람은 보미뿐이었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복호가 보반 부인과 눌지에게 보미를 소개했다.

“어머니, 이 여인은 보미라고 합니다. 고구려에서 맞은 제 아내입니다.”

보반 부인과 눌지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아내? 고구려에서 혼인했단 말이냐?”

“대왕께서 제가 보미를 연모하는 것을 아시고 신국으로 돌아오기 전, 혼인을 시켜주셨습니다.” 

“인사 올리옵니다. 소녀 낭군을 모시고 있는 보미라고 합니다.”

목소리는 낭랑했고, 옷차림은 단정했으며 얼굴은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궁녀들은 아까부터 보미의 옷이며 머리, 신발 등을 훔쳐보느라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참으로 곱구나. 잘 왔다. 어서 들어가자꾸나.”

“먼저 들어가시지요, 어머님. 저는 제상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복호의 손을 꼭 잡은 보반 부인이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박제상에게 말했다.

“참으로 고맙소. 참으로 장한 일을 해 주었소. 그럼 이야기들 나누시오.”

눌지는 그 모습을 지켜본 후 천천히 몸을 돌려 마구간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제상, 그대에겐 무엇이든 숨김없이 말할 수 있고, 무엇을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소. 내물 마립간께서 세상에 남긴 혈육은 나와 복호 그리고 미해 셋이오. 복호와 미해는 내 두 팔과도 같은데 겨우 한쪽 팔만 찾았으니 나머지 팔을 찾지 못한다면 어찌 마립간이라 할 수 있겠소.”

박제상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도스님의 예감이 옳았다. 눌지는 쓰다듬던 말의 고삐를 박제상에게 주며 말했다. 

“이제 막 고구려에서 돌아온 그대에게 이런 부탁을 하다니, 내 그대를 볼 낯이 없소. 허나 복호가 무사한 것을 보니 미해가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구려. 부디 미해를 내게 데려와 주오.”

박제상은 잠시 그대로 굳어버렸다. 몸은 바위가 된 듯 움직여지지 않았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눌지의 울먹이는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고 눌지의 얼굴은 희미하게 보였다. 

“제상, 제상! 정신이 드시오? 내 그대에게 이렇게 부탁하오.”

결심을 마친 박제상은 눌지가 내민 고삐를 잡고 말에 오르며 말했다.

“신은 지금 바로 율포로 가서 배를 탈 것입니다. 허나 왜국은 고구려와 다릅니다. 가야와 백제의 간자들이 사방에 있으니 섣불리 속일 수도 없습니다. 저는 오늘 고구려에 다녀온 공을 제대로 치하하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마립간을 배신하고 월성의 말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제가 율포에서 배를 타면 마립간께서는 박제상이 반역죄를 저지르고 도망갔다는 소문을 내십시오. 가족을 보지 않고 지금 바로 떠나야 왜국 왕을 속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반역을 저지르고 도망쳤다는 소문이 왜국에 한시라도 빨리 전해져야 합니다.”

“그대의 처자는 내가 책임을 질 테니 걱정하지 마시게.”

아내와 딸을 떠올리며 박제상은 입술을 깨물었다.

“부탁드립니다.”

눌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자마자 박제상은 지체 없이 말을 달려 율포로 향했다. 배에 오른 박제상은 갑판에 서서 율포의 풍경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보는 마지막 신국의 모습이겠지’

뒤늦게 남편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말을 달려 율포에 도착한 박제상의 아내는 이미 배가 떠난 것을 보자 다리가 풀리고 말았다. 점보다도 작은 저 배에 남편이 타고 있을 것이었다. 비로소 이별이 실감이 났다. 아마도 살아서 다시 만나기는 어려우리라. 

“흐 흐흑”

아이처럼 두 다리를 뻗고 철퍼덕 주저앉은 박제상의 아내는 해가 지고 밤이 올 때까지 율포를 떠나지 않은 채 울고 또 울었다.  

[불교신문3532호/2019년11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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