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 전 그 때로 돌아가 원효를 만나다

원효스님이 태어난 경산
불지촌 밤나무 아래에는
‘제석사’라는 소박한 절이…

분황사에서 붓을 꺾은 뒤
철창같은 관념의 門 벗고
아! 화쟁…눈부신 평화정신

조계종 화쟁위원회(위원장 호성스님)는 10월25일부터 27일까지 2박3일간 경북 경산과 경주 등지에서 원효스님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쫓으며 화쟁 이론을 배울 수 있는 ‘원효의 발자취 순례’를 개최했다. 이 가운데 원효순례에 참여한 중앙승가대학교 교학국장 지월스님이 순례기를 본지로 보내와 전문을 싣는다.

경산 초개사 마당에서 순례단이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초개사는 원효스님이 불교에 출가할 뜻을 굳게 세우고 자신의 집을 헐어 처음 연 절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툭 터진 경산의 뜰을 보는 것만으로 어린 시절 원효의 모습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경산 초개사 마당에서 순례단이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초개사는 원효스님이 불교에 출가할 뜻을 굳게 세우고 자신의 집을 헐어 처음 연 절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툭 터진 경산의 뜰을 보는 것만으로 어린 시절 원효의 모습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원효라! 오랜 세월 귀에 익숙한 한국의 대표적인 고승이다. 그러나 익숙한 고정관념처럼 해골바가지에 담긴 이야기, 요석 공주와 사랑이야기, 머리를 기르고 저자거리에서 춤을 추고 ‘나무아미타불’을 불렀을 정도의 단편들이 머릿속에 늘 남아 있을 뿐이었다. 비록 나도 스님이 됐지만 원효를 만날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사극이나 드라마도 단지 재미있는 영웅담으로만 느껴졌을 뿐 그의 삶을 공감하고 공유하기에 나는 너무 턱없이 어렸었는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에 잡혀 지내던 어느 날, <불교신문>에서 ‘원효 순례’ 예고 기사가 눈에 들어왔고, 우연과 필연처럼 마음이 일어났다. 연수교육도 교육이지만 어디론가 떠나면서 가을의 휴식을 갖고 싶었다. 잠시 모든 것을 놓고 낯선 길에서 낯선 길로 이방인이 돼 아무도 모르는 과거 여행을 떠나는 것은 신나는 일이기에 원효의 발자취 순례는 나에게 최적격이었다. 

마침내 순례는 낯선 사람들과 동화사 템플스테이 큰방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원효를 만나다’를 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동참한 사람들과 원을 그리듯 앉았고 이 작품의 감독인 김선아 씨와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도 퍽 흥미로웠다. 나는 팔공산 깊은 공간의 아늑함도 좋았지만, 인간적인 원효를 만나 깊숙이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에 기쁨과 감사를 느낀다. 우리는 약 1400년 전 삼국시대로 돌아갔었고, 그리고 동일 인물을 두고 한 소년으로서, 또 한 분의 스님으로 만나게 되었다. 

이틀 날, 원효의 탄생지인 불지촌 밤나무 아래에는 ‘제석사’라는 소박한 절이 희미한 역사를 머금고 있었다. 원효와 설총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지금의 ‘초개사’는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산골짜기 마을이었다. 산 중턱 높은 곳에 햇살과 바람은 고요했다. 툭 터진 경산의 뜰을 보는 것만으로 어린 시절 원효의 모습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그러나 일찍이 남다름을 알고 한적한 곳에 작은 움막을 지어 독서와 사색의 공간을 만들어 준 따뜻한 삼촌과 어머니 죽음은 어린 화랑의 나이 15세가 되기 전이었다. 이 두 사람의 죽음과 이별 앞에 몸부림을 쳤어야 했던 원효의 아픔과 고뇌는 단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원효는 15세의 나이에 당대 최고의 큰 절 황룡사로 출가하게 된다. 건강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화랑에게 내려진 형벌 같은 아픔과 무상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출가를 했지만 또 다시 6두품 출신으로 왕실불교에 편입되지 않은 탓인지 그는 다시 황룡사를 떠나 파란만장한 만행을 떠나야 했다. 
 

순례 첫째 날 지난 10월25일 동화사 도량으로 걷고 있는 순례단의 모습.
순례 첫째 날 10월25일 동화사 도량으로 걷고 있는 순례단의 모습.

무상을 알아버린 한 사문, 명석하고 총명함을 지닌 사문이 뚫어야 하는 것은 비단 탁상공론 같은 불교적 교리 속에 만족할 수 없었다. 삼국 통일 전후의 전쟁과 가난 등 시대적 대 혼란기를 살았던 백성들의 삶 또한 외면할 수 없는 고단한 그의 숙제였다. 100여 종의 저술만큼 경을 보고 론을 짓고 또 소와 별기를 달고, 또 다시 주유천하를 하며 삼계유심(三界唯心)의 깨달음을 향해 나아갔다.

심도 깊은 점수의 행각은 불꽃같은 이사무애, 사사무애의 길이었다. 이번 순례에서 원효가 분황사에서 붓을 꺾은 뒤, 철창 같은 관념의 대문을 벗어 던지고 저자거리로 나간 것은 몸서리치는 분노와 혁명처럼 다가왔다. 더 이상 문자와 틀에 매인 세상의 굴레에 묶이지 않겠다는 염원이었다. <화엄경>의 ‘일체무애인(一切無碍人) 일도출생사(一道出生死)’의 ‘무애’를 따라 무거운 짐을 털어내고 가벼운 나비가 된 것이었다. 출가자의 출가였다.

결국 원효는 가슴의 순수한 열정과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대 자유인의 면모를 과감하게 드러냈다. 또 대자대비의 운명처럼 분열된 민중의 정신을 통합하려고 모든 심혈을 기울인 것이 곧 ‘화쟁’이라는 평화의 정신이었기에 그의 일생은 더욱 눈부시다. 

글이 살아 움직일 때가 있는 것일까! 지난 날 ‘초발심자경문’과 ‘발심수행장’을 배웠지만 그 때의 글은 잠을 자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주장자의 외침처럼 뜨겁게 살아 움직이는 것은 아마도 원효와 거리가 많이 가까워진 덕분이다. 그의 구도열을 드러내는 ‘발심수행장’의 중요한 몇 구절을 적어본다. “절하는 무릎이 어름같이 시리더라도, 불기운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주린 창자가 끊어질 듯 하더라도, 음식을 구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갈등과 분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 너무도 심각한 이념갈등과 빈부와 계층갈등, 그리고 젠더갈등까지 우리 모두가 감내하는 고통은 점점 크고 확산되고 있지만 이를 해결해 가는 지혜와 열정은 좀처럼 성숙해보이지 않는다. 삼국통일의 과정, 분열된 민심과 혼란을 수습하려는 원효의 ‘화쟁’이 오늘 날 다시 크게 다가오는 것은 시대상의 반영 외에도 지혜와 자비로서 혼신을 다해 바친 위대한 업적과 정신이 너무도 그립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신문3532호/2019년11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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