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70주년, 6·25와 불교 ③ 법인스님이 겪은 한국전쟁
한국전쟁 70주년, 6·25와 불교 ③ 법인스님이 겪은 한국전쟁
  • 이성수 기자
  • 승인 2019.11.04 1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전쟁은 멍청한 사람들이 하는 짓…평화 소중하다”


인민군 해인사 스님들 징집
백련암 머물면서 탁발 정진
석굴암 참배 남북통일 발원
남북통일 기원 각원사 창건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천안 각원사 조실 법인스님은 평화의 소중함을 강조하며 당시 일화를 들려 주었다.   이시영 충청지사장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천안 각원사 조실 법인스님은 평화의 소중함을 강조하며 당시 일화를 들려 주었다.

 

내년에 7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전쟁은 다시는 되풀이 해서는 안 될 비극이다. 천안 각원사 조실 법인스님은 강화 보문사에서 정진할 때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합천 해인사로 피난을 떠났다. 참혹한 전쟁의 소용돌이에도 흔들림 없이 수행정진했다. 올해 세수 89세인 법인스님을 지난 9월19일 천안 각원사에서 만나 한국전쟁 당시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 보문사에서 해인사로 피난

“쿵, 쿵, 쿵” 1950년 6월 25일 이른 시간부터 벼락 같은 대포 소리가 바다 건너에서 들려왔다. 그해 음력 3월 15일부터 법인스님은 강화도 보문사에 머물며 채공(菜供)과 공양주 소임을 맡아 대중을 외호하며 기도 하고 있었다. 법인스님 외에도 정영스님을 비롯한 수좌 7~8명이 주석하고 있었다. 대포 소리의 원인은 조금 늦게 알았다. “북한군이 쳐 내려온다”는 소식이 보문사까지 전해졌다.

대중은 “걸망 지고 섬을 떠나야 한다”는 의견을 같이하고, 3일 뒤 강화도를 빠져 나왔다. 그날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지금처럼 육지와 연결된 다리가 없었기에 배를 이용해야 했다. 마을 청년이 노를 젓는 나룻배를 1시간 정도 탄 뒤에야 겨우 섬에서 나올 수 있었다. 법인스님은 “몇 년 전에 배정만이라는 분이 각원사를 찾아왔는데, 그때 사공이 본인이라고 밝혀 놀랐다”고 말했다.

섬을 건너온 스님들은 인천 송도와 경기도 수원을 잇는 수인선(水仁線) 철길을 따라 걸었다. 수원역에 가서 남쪽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로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계획을 바꿨다. 시도 때도 없이 폭격이 이어져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법인스님은 “어느 바닷가 포구에서 수중에 있는 전 재산인 3000원인가 5000원을 주고 돛배를 빌려 남으로 향해 충남 당진에 도착했다”고 회고했다.

바다에서 멀지 않은 보덕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30km 정도 떨어진 서산 개심사까지 걸어갔다. 그곳에서 잠을 청한 후 덕숭산 정혜사에 가서 하루를 보내고 정영스님과 백마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탔다.

법인스님은 “고란사에서 이틀밤을 보내고 논산 개태사를 거쳐 금산 보석사 사하촌에서 머물다 영동까지 걸어갔다”면서 “영동역에서 겨우 남행(南行)열차를 탔다”고 회고했다.

이미 기차에는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간신히 기차에 올랐지만 다음역인 김천역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이 빠르게 남하(南下)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기차를 운행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법인스님과 정영스님은 김천역에서 구미를 거쳐 지례까지 도보로 이동한 후, 버스를 타고 수도산 청암사수도암으로 향했다. 수도산을 넘으면 출가도량인 가야산 해인사 백련암을 갈 수 있었다. 기름 대신 목탄(木炭)을 연료로 사용하는 버스였다. 고개라도 만나면 모두 버스에서 내려 밀어야 했다.

청암사 수도암에 도착해 3일을 지내고 산을 넘어 해인사에 도착했다. 길이 제대로 없어 숲을 헤치며 가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백련암에 도착했다. 보문사를 떠난 지 20여일 정도 흘러 7월 중순을 넘어섰다. 7월16일 금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7월20일에는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해인사에서의 피난 생활

“백련암에 가니 20~30명의 스님들이 피난을 와 있었습니다. 대부분 포산스님 권속들 이었는데, 제가 제일 어려서 공양주를 했지요.” 그런데 이틀 정도 지난 후 스님들이 보이지 않았다.

가야산에 들어와 해인사를 점령한 인민군(빨치산)들이 젊은 스님들을 강제 징집해 국일암에서 군사훈련을 시켰던 것이다. 관음전과 궁현당에 있던 젊은 스님 50여명도 함께 강제 로 훈련을 받았다.

가야총림은 해산되고 사중(寺中)에 있던 스님들은 몸을 피해야 했다. 얼마 뒤 들려온 소식에 깜짝 놀랐다. “해인사를 점령한 인민군들이 국일암에서 3일간 훈련시킨 스님들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해 거의 모두 희생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민군이 낙동강에서 총공세를 전개한 것이 8월말 9월초였다. 약관(弱冠)의 법인스님은 무서운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백련암을 떠나지 않았다.

“백련암을 혼자 지키는데 밤이면 공비들이 몇 명씩 와서 쌀, 된장, 간장 등을 가져가고, 낮에는 국군과 경찰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합천경찰서로 연행돼 각서를 쓴 적도 있습니다. 가야초등학교 김덕수 교장 선생님이 보살펴 주어 겨우 풀려났습니다.”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인민군은 퇴각했지만 가야산을 무대로 삼은 빨치산들이 해인사의 젊은 스님들을 끌고 가기도 했다. 가야산은 지리산, 대둔산, 수도산을 경유하는 요충지로 빨치산의 주요 동선이었다. 500명~700명 정도 되는 빨치산이 해인사에 들어와 일주일씩 머물기도 했다.

당시 해인사 주지는 제헌의원을 지낸 최범술 스님이었다. 홍제암에는 임환경 스님과 강고봉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법인 스님은 “인민군이 해인사 전각을 다 차지하고 있었는데, 송월스님 은사인 정혼혜스님이 ‘인민공화국 해인사위원장’이라면서 행세하는 것을 봤다”고 기억했다.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전쟁이 장기화되고, 치안이 확보되면서 해인사도 점차 정상을 찾아갔다. “ 나는 1951년 4월에 해인사 법보강원(法寶講院)에 입학해 공부를 했습니다. 전쟁 중임에도 스님들이 공부하고 수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법인스님은 자비량으로 매월 쌀 3말을 내고 강원에서 공부를 하게 됐다. 하지만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신문이나 책이라도 볼라고 하면 빈축을 받아야 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법인스님은 “교육 없는 사회에 무슨 깨달음이 있고 수행이 있고 도통(道通)이 있느냐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면서 “그 뒤로 교학은 물론 신학문에 관심을 갖고 공부에 집중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전쟁 기간이었지만 해인사는 새벽 4시에 예불을 모시고 30~40명 정도의 대중이 발우공양을 했다. 낮에는 국군과 경찰이, 밤에는 빨치산이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전쟁 기간 마을은 물론 사찰 형편도 곤궁했다. 해인사를 찾아오는 신도들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가야, 야로, 숭산, 고령, 합천을 거쳐 대구에 가서 탁발을 해서 부처님께 마지공양을 올리고 주린 배를 겨우 채웠다. 부산, 진주, 통영까지 탁발을 다녔다.

법인스님은 “산중 도량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이 첫째도 경제, 둘째도 경제였지만 전시(戰時)에 수입이라고는 탁발 외에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면서 “지역, 장소, 거리를 가리지 않고 매월 1주일 정도는 탁발을 다녀야 했다”고 말했다.
 

1951년 해인사 법보학원 학인 시절의 법인스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수행과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1951년 해인사 법보학원 학인 시절의 법인스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수행과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 석굴암에서 남북통일 발원

1950년 10월 즈음. 대구에 탁발을 나갔던 법인스님은 경주 불국사과 석굴암을 참배하면서 환희심이 일었다. “석굴암 부처님을 뵙는데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부처님을 참배하는 순간 나의 여생을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도량 건설에 바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웠습니다.”

다음은 당시 스님의 발원이 담긴 ‘성전건립서원(聖殿建立誓願)’이다. “동란지중탁발차(動亂之中托鉢次), 참배불국석굴암(參拜佛國石窟庵), 통일염원건성전(統一念願建聖殿), 제이대성발원서(第二大成發願誓)” 우리말는 이렇다. “(6·25) 전쟁 중 탁발차, 불국사와 석굴암을 참배하고, 통일 염원의 성전 건립을 발원하며, 제2의 김대성을 발원했다.” 1977년 천안 태조산에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각원사를 창건한 것도 이 원력에서 비롯됐다.

백련암으로 돌아온 법인스님은 새벽 3시에 일어나 도량석, 예불에 이어 관음정근을 고성염불로 하며 정진했다. 이때 “네 가지 큰 서원을 물러서지 않고 명심하여 잊지 않고 두타행을 행해 원을 이루기 위해 신명을 다 바치겠다”며 사대서원(四大誓願)을 발원했다. 도제(徒弟), 교육(敎育), 포교(布敎), 불사(佛事)가 그것이다. 한국전쟁의 격동기였지만 이에 흔들리지 않고 굳은 신심으로 전법(傳法)의 원력을 세우고 변함없이 수행해 온 것이다.

법인스님은 “절에 와서 산지 74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조금 있으면 세속 나이로 90살이 된다”면서 “남과 북이 나뉘었지만 서로 복지사회(福祉社會)가 되고 남북교류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발원했다.

“전쟁하는 사람은 멍청한 사람들”이라면서 “전쟁은 상처가 크다”고 평화의 소중함을 강조한 법인스님은 불자들에게 자비, 정직, 근면, 봉사, 개척 등 다섯 가지를 당부하며 말을 맺었다. “개척을 안 하고 화두, 참선, 기도, 염불이 어디있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공부합니까? 자기를 향상하려고 개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자비, 정직, 근면, 봉사해야 합니다. 불자들은 물론 모든 국민과 인류가 이런 방향으로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법인스님은…
1931년 경남 통영(충무) 출생. 1946년 해인사에서 득도. 법호는 경해(鏡海). 1958년 해인대 종교학과를 거쳐 동국대 사학과와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졸업. 1967년 동국대 대학원 석사과정, 일본 대동문화대학 대학원 수사과정 졸업. 1987년 일본 대동문화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 취득. 1975년 각원사 재일(在日) 포교원 명월사(明月寺) 창건. 1977년 천안 태조산 각원사 창건. 현재 각원사 조실.

천안=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이시영 충청지사장 lsy@ibulgyo.com

[불교신문3532호/2019년11월6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