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 중 오온을 관하는 수혜가 본질

무상, 고, 공, 무아 괴로움 원인
오온의 무상함 알아 집착 않고
세계를 공이라 관할 수 있어야

등현스님
등현스님

가행위(加行位, prayoga)는 ‘적용(application)’ 또는 ‘수행(yoga)을 더함(pra)’으로 번역될 수 있다. 자량위에서는 문혜와 사혜가 본질이지만 가행위에서는 그것을 수행으로 적용시킨 수혜를 본질로 한다. 6가지 삼매 중 하나의 상태에서 오온을 관하는 것을 수혜(修慧)라 한다.

찰라 삼매나 5선 중의 하나에서, 오온에 취착하는 모든 존재가 괴로움임을 보고, 괴로움의 원인은 오온과 그 대상들인 법에 대한 집착임을 알며, 그 원인인 집착을 소멸하면 해탈 열반임을 경험하고,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도)이라는 위의 사성제를 각각 네 개의 구체적 양상으로 이뤄진 16행상(行相)을 관하는 것이다. 그 네 가지는 무상·고·공·무아이니 고이며, 인·집·생·연이니 고의 원인이고, 멸·정·묘·리이니 열반이고, 도·여·행·출이니 도이다. 

고성제의 4가지 행상은 무상, 고, 공, 무아이다. 인간이 괴로운 이유는 크게 네 가지 있다. 첫째, 무상하니 괴롭고, 둘째, 고통스러워 괴롭고, 셋째, 공하니 괴롭고, 넷째, 무아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첫째, 무상에 대한 관이다. 제석천왕도 천상에서는 커다란 권력이 있지만 선업이 다하면 언젠가 다시 지옥에 떨어지게 되고, 전륜성왕도 복이 다하면 종의 집에 태어나야 한다. 과거에 무수한 영웅호걸이 한 시대에 태어나고 주름잡았지만 결국엔 모두 다 한줌의 흙이 되어 사라졌듯이, 나 자신 역시 그러함을 관한다.

부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때문에 슬픔에 잠겨있는 키사고따미에게 아무도 죽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오라고 하셨다. 사람이 죽지 않은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키사고따미는 슬픔으로부터 벗어났다.

또 어렸을 때 사랑했던 가족이나 친척 또는 스쳐갔던 많은 지인들이 저 세상에 가 있듯이, 사형수가 죽을 날만을 기다리듯이, 내 의지에 관계없이 나는 저 세상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관찰한 후, 죽은 후 사람의 몸이 변해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즐거움과 괴로운 느낌이 대상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것, 그리고 마음은 대상의 생멸과 함께 같이 생멸을 거듭하고, 생각과 욕구 역시 생멸함을 있는 그대로 지켜본다. 이처럼 조건 지워진 오온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에 집착하면 괴로움이다. 이것을 무상의 고라 한다.

둘째, 고통에 의해서 오는 괴로움이다. 왜 고통이라고 하는가? 병은 괴롭고, 늙음도 괴롭고, 병이 온몸에 퍼진 죽음은 더욱 괴롭다. 몸이 같은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고 계속 정지해 있어도 괴롭다. 그러나 몸의 자세를 바꾸면 고통은 변하여 안락함이 되고, 그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계속 정지해 있으면, 안락함이 다시 고통이 된다. 몸은 반드시 음식물과 마실 물을 끊임없이 공급해주어야 하고 먹은 만큼 그 때 그때 배설해 주어야 한다.

몸이 원하는 때에 먹어주지 못하면 그것도 괴로움이고, 배설할 적절한 장소를 찾지 못해 타이밍을 놓쳐도 괴로움이다. 먹어야 할 음식물을 얻기 위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또한 추우면 난방 더우면 냉방을 해줘야 하니 이것도 괴로움이다. 지구는 많은 생명들이 같이 살고 있다. 모기 파리 초파리들이 몸을 물어대면 그것도 고통이고, 세균들이 몸을 침범해도 고통이다. 이것이 몸이 존재하는 한 지속되어지는 고의 고이다. 

셋째, 무아의 고는 오온에 취착하는 괴로움이다. 몸의 부정함, 느낌의 괴로움, 마음의 무상함, 법의 실체 없음 등을 반복하여 관함으로써 오온에 대한 집착을 다스려야 한다. 

넷째, 공의 괴로움은 대상(법)에 집착하는 괴로움을 말한다. 공관(空觀)이란 경험세계를 ‘공’이라고 ‘관’하는 것이다. 세계를 공이라고 관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오온(五蘊)을 분해하여, 그 각각의 요소인 자아를 공이라고 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6근과 6경을 관하여 그 각각의 요소들이 의존되어 있고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이 오온과 12처는 무상하고, 무상한 것에 집착하면 괴로우며,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나’나 ‘나의 것’이 아니고 ‘나’나 ‘나의 것’이 아님을 공이라 한다. 이처럼 관하는 것을 무아와 공의 고라 하고 이때 수행의 열기가 발생하기 때문에 난위(usn.a)라 한다.

[불교신문3531호/2019년11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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