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바라볼 ‘이념의 별’이 있다면…”

아나키스트 성지 안의서 태어나
기존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채
70 여년 간 자신만의 길 걸어와

초조, 재조대장경, 교장 비롯
돈황 필사본까지 전산화 작업해
고려시대 불교문헌 정리 끝내
“일로써는 힘들었지만 잘 놀아”

함양서 혼자 할 수 있는 일 고민
자신의 생각 정리하겠다고 결심
‘공’에 대한 생각 ‘공동선’서 연재

고반재에서는 고려대장경을 비롯해 티베트, 남방국가 등 세계 각국의 대장경을 볼 수 있다. 또 함양에서 나온 문집들, 함양 지리산 관내 사찰에서 발간한 불전들도 있어 함양지역 명소로 통한다. 고반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을 꼽으라면 초조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천년지장(千年之藏)이다. 스님은 일본 남선사 소장 초조대장경을 인쇄해 보관하고 있다. 김형주 기자
고반재에서는 고려대장경을 비롯해 티베트, 남방국가 등 세계 각국의 대장경을 볼 수 있다. 또 함양에서 나온 문집들, 함양 지리산 관내 사찰에서 발간한 불전들도 있어 함양지역 명소로 통한다. 고반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을 꼽으라면 초조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천년지장(千年之藏)이다. 스님은 일본 남선사 소장 초조대장경을 인쇄해 보관하고 있다.

장경도량고려대장경연구소 이사장 종림스님이 26년에 걸쳐 진행해 온 대장경 전산화 사업을 마무리하고 은거 중이다. 함양군 안의면에 책박물관 고반재(考般齋, 군자의 즐거움을 뜻함)를 연 스님은 그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공부하는 사람들과 토론하며 지내고 있다.

10월23일 찾아간 고반재는 작은 언덕에 둘러싸여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곳이었다. 초조대장경부터 세계의 대장경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종림스님을 만났다.

고반재의 또 다른 별칭은 ‘아나키의 전당’이다. 안의는 우리나라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성지로 통한다. 광복 이후 1946년 이곳에선 전국 아나키스트 대표자 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스님이 안의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시인 유치진, 유치환 형제, 안병준, 하기락 등등 하나 같이 유명한 아나키스트들이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청소년 시절 은사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스님은 평생을 아나키스트로 살아왔다. 출가해 기존 질서에 편입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것 또한 그 때문일 것이다.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진학해 학자가 될까 아니면 출가를 할까 고민하다가 출가를 택한 스님은 고향과 서울에서 가장 먼 평창 월정사로 향했다. 추운 겨울 그곳에서 행자생활을 하던 스님은 3월 수계식을 앞두고 합천 해인사로 떠났다. 월정사가 가족 같은 분위기라 좋았지만 공부하기는 해인사가 낫다는 얘기를 듣고 간 것이다.

해인사 행자생활이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20명이 넘는 행자들과 지내다가 스님은 지리산으로 한 달 넘게 도망간 적도 있다. 돌아온 스님은 1972년 스물여덟 늦은 나이에 지관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승가대학에 입학한 스님은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졸업했다는 얘기도 하지 않고 다른 학인들과 똑같이 수업을 들었다. 그러다 강의를 하러 온 서경수 동국대 교수가 알아보는 바람에 사집반으로 월반을 했다. 덕분에 스님은 윗반, 아랫반 학인 모두와 친했다.

스님의 아나키스트 면모는 학인시절 드러났다. 해인사를 바꿔보자며 여연스님 등 학인 스님 몇 명과 변혁을 도모한 것이다. ‘자비의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학인 스님들은 강원 학과부터 운영시스템, 도서관 운영, 가톨릭 조직까지 파트를 나눠 자료조사를 하고 승가대학은 물론 사찰 운영까지 혁신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그러나 종무소 운영까지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리면서 거사가 발각됐다. 대중공사가 벌어졌고 30여 명 스님이 절을 떠났다. 그 결과 도서관, 간병실이 생겼고, 외전도 공부할 수 있게 됐다. 많은 학인이 떠났지만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출가한 스님들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 1960년대 스님들은 정화를 하면서도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유지한 반면 1970년대 출가자들은 분위기부터 달랐다. 결과적으로 그 스님들이 1994년 종단 개혁을 추동했다.”

스님은 스스로를 신세대 1그룹이라고 했다. 도반들과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바람에, 세수로는 기성세대와 가까웠으나 기존질서에 편입되지 않았다. 정화세대가 일찌감치 어른으로 자리 잡고 있은 상황에서 스님은 기성세대를 따르는 대신 자유를 얻었다.

월간 해인 편집장, 해인사 도서관장을 맡아 변화를 추구했다. 오늘날 해인지를 있게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1984년 해인지 편집장 소임을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전까지는 학인 스님들이 팸플릿 형태로 만들었는데, 스님은 생각엔 하루면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편집장을 맡으면서 편집권을 요구했다.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소금창고를 서점으로 만들고 운영권까지 받아왔다.

“24호부터 판형을 바꾸고 새로운 편집을 시도했다. 사중에 소허, 법성, 심형스님들이 결합했다. 문중이나 승납을 따지지 않고, 승속을 가리지 않았다. 10여 명의 편집위원들이 상황에 따라 편집장 소임을 맡았다. 서로 얘기하다 나오는 좋은 의견을 모아서 제작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도서관장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창고에서 쌓여있는 책들을 우선 약식 분류했다. 자유열람제도를 도입해, 마을사람들도 책을 빌려서 읽을 수 있게 했다. 1500여 권에 달하는 경전들을 정리하겠다고 스님은 서울에 가서 컴퓨터도 배웠다. 도서관 전산화 작업을 하면서 팔만대장경 카드색인, 목록을 만들었다.

그 때만 해도 대장경 전산화를 생각한 건 아니었다. 1990년대 초 일본 하나조노 대학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신수대장경 전산화 작업을 본 게 결정적이었다. “한자가 반자동으로 입력되는 걸 보고 우리도 해 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거금을 주고 사서 돌아와 스님들을 불러 모았다.” 1993년 해인사 뒷방서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설립됐다.

기술, 재정, 조직을 먼저 따졌다면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사온 프로그램은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어 써보지도 못했다. 그저 전산화 작업을 하는 계기만 됐을 뿐이다.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불교가 공헌한 게 없다. 사회변화를 쫓아가지도 못하는데, 대장경 전산화를 통해 한 발 앞서 나가자고 생각했다. 대장경을 전산화하면 정보로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정보화 사회라는 빈 땅에 우리가 가장 먼저 진입하자며 시작했다.”

고려대장경 전산화에 대한 관심은 폭발했다. 초기에는 사업비 3분의1을 후원비로 충당했을 정도로 성원이 답지했다. 덕분에 스님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대장경 전산화를 해냈다. 그러나 힘들고 지난한 시간들이었다. 매년 ‘이것만 끝내고 내년엔 연구소 문을 닫자’고 할 정도였다.
 

고반재에는 세계에서 출간된 대장경이 보관돼 있다.
고반재에는 세계에서 출간된 대장경이 보관돼 있다.

2004년 고려대장경 입력을 마쳤다. 1년만 교정을 보고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교정하는데 3년이 걸렸다. 그 사이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해인사 판본의 계통을 알 수 있는 초조대장경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앞서 천혜봉 교수가 1960년대에 일본 남선사에 초조대장경이 전해지는 것을 확인했다.

고려대장경연구소는 일본 하나조노 대학, 남선사와 연계해 초조대장경 DB작업에 착수했다. 초조대장경이 모본으로 삼은 송나라 칙판대장경에 영향을 준 문헌을 찾다가 돈황에서 나온 필사본까지 도달했다. 결국 어느 대본을 활용해서 대장경 판각까지 왔는지를 확인해 전산화했다. 의천스님이 마련한 교장도 정리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부족한 부분이 바로 한문으로 저술된 주석서다. 스님들이 공부한 흔적이라 할 수 있는 주석서를 의천스님이 결집한 것이 교장이다. 일본에 남아 있는 교장 목록 필사본을 근거로 사찰문고와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데이터를 구축했다.” 20여 년에 걸쳐 고려시대 문헌을 정리한 스님은 “일로는 힘들었지만 잘 놀았다. 진짜 재밌게 했다”고 말했다.

스님은 24년간 모은 연구 성과와 전산화 결과물을 지난 2017년 동국대에 기증했다. “전산화를 시작하고 가상현실이 오면 불교가 날개를 달고 날 줄 알았는데 웬걸. 10년만 젊었어도 활용방안까지 고민했을 것 같은데, 학자들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 앞으로 하고 싶은 건 개념어 사전을 만드는 것이다. 공(空)의 경우 정토에서 보는 공, 중론에서 보는 공, 지역 따라 경전에 따라 변한다. 변화되는 흐름을 알 수 있게 학자들과 정리하고 싶다. 재료는 마련됐으니 연결만 시켜주면 되지 않을까.”

함양에서 공부모임도 하고, 전시도 하지만, 스님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스님은 올 초부터 공동선(www.comngood.co.kr)에서 ‘공에 대한 단상’을 연재 중이다. 스님 자신이 평생 고민해 온, 공을 어떻게 보고 접근해야 하는 지 원고지 위에 정리하고 있다.

영원한 아나키스트인 스님은 깊은 산 중에서도 세계가 바뀌길 원하고 있다. “사람한테 의미를 주는 건 바라보고 갈 이념이다. 우리가 함께 바라볼 ‘이념의 별’이 있다면 지금 힘들더라도 그 방향으로 나가려고 노력하지 않겠냐.” 변화를 원하는 이들이 모여 방향이라도 함께 정하면, 희망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 스님은 말한다.
 

함양=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사진=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3531호/2019년11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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