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박재철’ 칼날같은 결단력으로 출가 결행하다

대학교 3년 휴학 후
평소 꿈꿔 온 출가의 길 선택
친구 8명과 이별사진 찍기도
出世間 때도 작은 보따리 하나
그 안에는 양치도구 양말 내의
애독하던 책이 몇 권이 전부

법정스님이 출가 전에 머물렀던 목포의 정혜정광원 법당 내부. 이곳에서 스님은 숙식을 하며 불교공부에 심취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이 출가 전에 머물렀던 목포의 정혜정광원 법당 내부. 이곳에서 스님은 숙식을 하며 불교공부에 심취하기도 했다.

“대학(교) 2년까지 우리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런대로 대학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3학년에 올라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재철이가 갑자기 휴학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자금 조달의 어려움. 이 소식을 듣고 ‘푸른 별’(재철이가 지은 모임의 명칭. 나이 들면서 ‘여수회’로 개칭하였음)의 친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3학년 1학기는 등록을 해서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학기에는 본인이 완강하게 거부해서 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쉬어도 다음 학기에는 반드시 복학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우리는 그 휴학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말릴 수가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친구 전남대학교 박광순 명예교수가 쓴 ‘나의 태평정기’라는 글에 담긴 내용으로 1955년 가을로 추측된다. 목포 정혜원(정광정혜원)에 머물며 어렵게 학업을 계속하던 스님의 휴학은 출가로 이어졌다. 박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당시 불교계에 불어 닥친 정화운동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아는 바와 같이 1955년 8월∼11월은 한국의 불교계에 미증유의 대격동이 몰아친 시기였다.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이른바 ‘왜색 중 추방을 요지로 하는 불교정화에 관한 담화문’ 발표를 계기로 시작된 정화운동이 1년여 동안이나 지지부진하다가 1955년 8월의 ‘전국승려(비구 · 비구니)대회’를 계기로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화의 바람이 목포지방에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55년 초가을 들어서였다.”

박광순 교수가 기록한 글을 좀 더 살펴보자. “당시 목포지역의 정화운동본부는 측후동의 정혜원이었다. 정화운동의 어려움의 하나는 인력부족이라고 들었다. 스님은 물론, 스님들을 뒷바라지 할 일손도 절대로 부족했다고 한다. 마침 당시 목포지역의 신도회 회장이 친구의 이모였는데, 그분의 권유로 법정은 정혜원으로 가서 잡무를 맡게 된 것이다. 처음 그러한 제의를 받았을 때 그는 일종의 아르바이트로 생각하고 응했던 것으로 들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의 생각은 차츰 달라져 갔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이 경우에 알맞은 표현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매일처럼 스님들을 대하게 되니 그쪽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불교계는 정화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지만 법정스님의 출가와는 무관해 보인다. 법정스님의 출가는 평소 많은 독서와 깊은 사색을 기반으로 수행자를 꿈꿔온 스님의 성품에서 비롯된 필연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대학생 박재철’은 맨 처음 출가의 뜻을 친구인 박광순 교수에게 전한 것으로 확인된다.

“11월 어느 날 그는 슬그머니, 그러나 단호하게 출가의 뜻을 나에게 알려왔다. 그가 정혜원에 입주하게 되면서 예전처럼 자주 만날 수 없는 것만도 안타까웠는데, 이제는 출세간(出世間)을 하겠다니 그야말로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말려도 보고 달래도 보고, 혼자서 안 되니 친구들이 함께 나서서 이야기해 보았으나 그의 마음은 이미 굳어져 우리의 어설픈 설득이 먹혀들어 갈 틈을 주지 않았다. 우리들이 이토록 안타까웠으니 오랜 세월 오직 아들 하나만을 믿고 홀로 살아 온 그 어머님의 애통함은 말과 글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재철의 자당(어머니)은 갸름한 얼굴에 후덕한 인상이셨는데, 법정은 어머님을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법정의 출가소식을 듣고서 어머니께선 여러 날 동안 침식을 끊으셨다고 들었다.”

법정스님은 박광순 교수를 비롯한 ‘여수회’ 친구들과 서울에 올라 가 있던 2명의 친구를 내려오게 해 총 8명의 친구가 사진관으로 가 이별의 사진을 찍었다. 그런 다음 늘 가던 중국 음식점(상해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일종의 송별회를 갖는다.

“평소에는 술도 즐겨 마셨던 그였지만 그날은 한사코 자제했다. 취한 얼굴로 절(정혜원)에 가기가 민망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행여 취하면 마음이 흔들릴까 걱정한 것이 아니었나 짐작한다. 주인공은 제쳐 두고 우리는 객만이 취해서 끝내는 울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새벽기차를 타고 오대산을 향하여 떠나고 말았다. 그의 행장이란 자그마한 책 보따리 하나. 그 안에는 치약과 칫솔, 양말과 내의, 그리고 애독하던 책이 몇 권 들어 있었다. 보자기는 내가 쓰던 것이 자신의 것보다 약간 크다고 해서 이별의 정표로 내주었다. 당시 우리 형편으론 여행가방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와 나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면 이따금 왜 그가 출가하게 되었는지를 물어 본다. 또 언론기관에서는 흥미로운 가십거리라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그의 출가에 가십거리는 없다. 자신의 장래에 대한 번민, 그리고 그의 깊은 자연사랑이 어울리어 내린 결단이었으리라 나는 믿고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차츰 도로가 정비되고 확장되어 육로운송이 발달하면서 연안을 운행하던 여객선 사업은 사양의 길로 접어든 것이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거친 파도를 헤쳐야 하는 배를 타기보다는 편한 버스를 타는 시대가 되어 시간도 절약하게 된다. 법정스님의 작은아버지가 운영했던 사업이 어려움에 처한 것도 이런 요인에 기인해 보인다. 박 교수는 법정스님의 출가계기를 다음과 같이 추측한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지방대학을 졸업한다 하더라도 장래가 밝은 것도 아니다. 1950년대 중반의 우리나라는 문자 그대로 저개발국이어서 실업은 구조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학업을 계속한다는 것은 주변에 고통만을 더하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다행히 어딘가 취직이 되더라도 구름처럼 물처럼 자유로움을 좋아하는 체질로 보아 거기에 적응해서 안주(安住)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들을 놓고 여려 차례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 대답을 했을 것이다. 훗날 길상사처럼 멋진 절간을 지어 놓고도 한사코 강원도 산골의 오두막에 머물기를 좋아한 것을 보면 그의 이러한 체질과 성품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스님의 필연적 출가를 예감한 사람은 가장 친한 벗 박광순 교수였다.

“‘청산에 살어리랏다’를 외우며,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아호를 ‘청산’이라 지은 재철.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 길은 오로지 출가뿐이라 작심했을 것임은 그의 행적을 들여다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운수행각(雲水行脚)속에서 무엇인가를 얻자!’ 마침내 그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청산, 그리고 수류화개(水流花開)하는 산방만이 그에게는 가장 아늑한 보금자리라 확신했을 것임은 그가 남긴 수많은 글의 행간 속에서 읽을 수 있다. 법정은 정이 많은 반면 칼날처럼 매서운 결단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결론을 얻었으니 단행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는 1955년 세밑에 오대산을 향하여 목포역에서 기차를 타게 되었던 것이다.”

법정스님의 출가인연에 정광정혜원에서의 생활은 큰 변곡점이 된다. 유발상좌인 정찬주 작가가는 자신의 <소설 무소유>에서 스님이 정광정혜원에서 ‘불교학생회 총무’로 있으면서 불교를 깊이 접하며 출가를 결행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스님의 출가인연에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한 때 출가 수행자 ‘일초스님’으로 살았던 고은 시인은 십 수년 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법정스님과 인연을 술회한 적이 있다. 당시는 법정스님이 생존해 있었던 시기였다. “이제는 그 분은 불교계에 큰 어른이 되었으니 지금 여기서 무슨 말을 하긴 좀 머슥해요. 세월이 흐른 뒤에는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요.”

정식 질문을 하기 전에 고은 시인은 법정스님의 청년시절을 꽤 소상하게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은 대화를 통해 출가의 길로 안내해 주었고 문재(文才)를 알아보았다고 했다. 출가도 권유했다는 내용을 암시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이 출가하기 위해 찾아가려 했던 효봉스님(법정스님 은사)도 고은 시인의 은사스님이었음은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하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스님의 출가인연은 어느 사건이 계기가 된 것이 아니고 ‘업연(業緣)에 의한 필연’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출가 전 ‘여수회’ 친구들과 이별을 아쉬워 하며 찍은 사진.(아래 맨 오른쪽이 법정스님)
출가 전 ‘여수회’ 친구들과 이별을 아쉬워 하며 찍은 사진.(아래 맨 오른쪽이 법정스님)
법정스님이 출가 전 오르내렸던 목포 유달산에서 본 아래 풍경. 바로 앞에 노적봉과 멀리 삼학도가 보인다.
법정스님이 출가 전 오르내렸던 목포 유달산에서 본 아래 풍경. 바로 앞에 노적봉과 멀리 삼학도가 보인다.

취재협조 : (사) 맑고 향기롭게

목포=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불교신문3530호/2019년10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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